<화제작기행>사진집 "러시아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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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차르체제 붕괴.볼셰비키혁명.두 차례의 세계대전.집단농장.크렘린궁을 둘러싼 권력암투....차르체제 붕괴부터 60년대까지 러시아가 겪은 정치.경제적 격동의 흐름을 한눈에 살피게 하는 사진집이 미국.프랑스등 8개국에서 동시출간돼 학계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로부터도 비상한 관심을 끌고있다.
프랑스에서는『러시아사람들』(원제 Les Russes.Brian Moynahan編.Albin Michel사 刊.3백19쪽.
2백50프랑),미국에서는『러시아 세기』(원제 The Russian Century:Birth of a Natio n 1894~1994.Random House.45달러)라는 제호로 출간된이 사진집은 포스트 코뮤니즘시대를 맞아 러시아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재발견운동의 하나로 이뤄진 결실인 셈이다.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사진 중에서 러시아 격동의역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흑백사진 3백여장을 엄선해 묶은 이 사진집은 시대순으로 편집이 돼 있어 인물을 통해 피비린내나는 러시아 현대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미하일 고 르바초프의 개방정책 이전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기획이었다.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아직 이 책이 출판되지 않고 있다.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아들과 딸들.스탈린.막심 고리키.레닌.
베리야.흐루시초프 등 역사적 인물이 거의 망라되고 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사진까지 실려 있어 특히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먼저 차르의 네 딸 올가.타티아나.마리아.아나스타시아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그들의 얼굴표정을 보면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감지한듯 어딘가 우울하고 눈의 초점이 공허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사진관에서 그 사진을 찍은 11년후인 1918년 7월 황제 일가는 외딴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의 한저택 지하에서 주치의.하인들과 함께 총탄에 비참하게 쓰러졌다.
호화와 사치.권력을 자랑하던 그들도 다른 수백만명 의 희생자들과 함께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니콜라이 2세 밑에서 군수뇌를 지냈던 오를로프왕자가 거만한 모습으로 러시아의 스텝지역에 맞게 개조한 메르세데스 벤츠 농기구를 타고 있는 사진도 인상적이다.그때만해도 오를로프는 궁정수도사인 라스푸틴의 비위를 거슬러 옷을 벗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91년 공산주의의 몰락은 적어도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에게는 러시아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결과를 낳았다.고고학자들이 황제 일가의 유해를 발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보다 앞서 77년에는 당시 러시아공화국 스베르들로프스크주 공산당서기장을 맡고 있던 보리스 옐친 현러시아대통령이 황제일가가 죽임을 당한 이파티예프 저택을 허물어버렸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내년 봄에는 황제 일가의 유해를 네바강변의한 사원에 묻는다는 계획까지 마련될 정도로 러시아에서는 지금 로마노프왕조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는 실정이다.
혁명가 레닌의 얼굴모습도 눈길을 끈다.1917년 이전 젊은 시절에 수염을 단정하게 깎고 가발을 쓴 모습은 경찰의 포위망을피해 다니던 때의 고충을 느끼게 한다.그러나 54세로 사망하기1년전쯤에 막심 고리키의 저택에서 찍은 사진은 혁명가로서 겪어야 했던 풍상을 읽게하는 일그러진 얼굴이다.
1941년에는 그때까지 이미 공포정치로 러시아 사상초유의 희생자를 냈는데도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듯 2차대전의 불길이 러시아로도 뻗쳤다.스탈린의 강압정치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군인들이나 여군전투기조종사들의 얼굴에서는 당시 나치에 맞서전쟁을 치르던 러시아국민들의 애국열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스탈린 위엄 엿보여 30년대 집단농장 콜호즈를 들락거리는 트랙터,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맨 근로자들이 담긴 사진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공산주의에 등을 돌린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있다.
1945년 이후의 사진들을 보면 나치에 맞서 승리를 거둔 스탈린이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흐루시초프.몰로토프.말렌코프.그로미코 등이 스탈린과 그의 심복 베리야의 몸짓 하나하나에도 벌벌 떠 는 모습이다.냉혈한으로 통하던 베리야가 스탈린의 딸을 안고서 온화한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사진도 아주 인상적이다.
〈鄭命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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