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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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양경심 292-3072」.
쪽지의 내용은 이렇게 휘갈겨쓴 게 전부였다.연필글씨였고 잘 쓰는 글씨는 아니었다.공부 잘하는 사람치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없다니까 양경심은 공부를 잘하는 여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나는 써니엄마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그리고 말총머리를 한 아가씨가 내 곁을 스쳐가면서 스파이가 접선하듯이 잽싸게 내 손에 쪽지를 쥐어준 순간을 설명해주었다.말총머리가 나를 뒤돌아보던 눈빛,약간은 겁먹 은듯 하면서도 무언가 간절하게 나를 보던 눈빛을 말해주었다.써니엄마는운전을 계속하면서 내가 내민 쪽지를 대강 한번 눈으로만 훑어봤을 뿐이었다.
『달순 어떻게 생각해…? 몸을 파는 여자들은 저렇게 가둬둬야하는게 맞는 걸까.몸을 팔면 죄인이고… 웃음을 팔거나 머리에 든 걸 팔거나 노동력을 파는 여자들은 괜찮고 말이야,남자도 그렇지… 피를 팔아서 먹고 살거나 여대생들 앞에서 벌거벗고 누드모델같은 걸 하거나 권투처럼 험악한 운동으로 먹고 살거나 그러는 건 다 괜찮고… 웃기지 않아…?』 나는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렇네요.좀… 웃기네요.』 『달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세상엔 그야말로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들이 의외로 굉장히 많다구.그런데 그것도 아주 합법적으로 당당하게 하면 걸리지 않거든.』 써니엄마가 말하다가 혼자 고개를 저었다.왜 이런이야기를 하게 됐지 하는 표정이었다.써니엄마가 한 공중전화부스앞에 차를 세우고 동전 몇닢을 집어주었다.
『빨리 전화해줘.양경심이네 집에.』 나는 부스로 가서 쪽지에적힌 전화번호를 누르고 양경심의 오빠라는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그 남자는 매우 놀라는 것 같았다.남자가 당황해서 그런지 내 연락처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나는 사정을 전해주는 것까지만 내 몫인 것이좋겠다고 생각했다.남의 일에 내 일처럼 끼어든다는 건 종종 웃기는 짓이었다.
다음날,써니엄마를 따라간 곳은 청량리 부근의 정신병원이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했는데,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진 낡은 건물에 무슨 병원같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어서 의사인줄 알 수 있었다.
써니엄마와 미리 연락이 돼 있던 의사 하나가 몇가지를 말해주었다. 『이 병원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수용돼 있습니다.경찰이나 검찰에서 의뢰한 정신상태가 이상하다고 보이는 피의자들도와 있구요,마약이나 히로뽕같은 향정신성의약품 투약자들도 있구요,물론 개인이 입원시킨 환자들도 있지만요,또 보호자가 없어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린 열일곱살 난 여자아이를 찾고 있어요.전 에미되는 사람이구요.』 의사는 언니가 아니라 에미라는 말에 놀라는 것 같았다.
『글쎄요,연락을 받고 미리 알아봤는데 열다섯부터 스물다섯 사이의 여자가 스무 명쯤 되더군요.우리도 그 여자애들의 나이를 정확히는 알 수가 없어서 넓게 잡은 겁니다.직접 한번 보실 수있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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