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책읽기] 당신이 뭐 어때서 … 절대 기죽지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미란다 줄라이-1974년 버몬트에서 작가 부부의 딸로 출생,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성장했다. 대학을 2년 만에 자퇴하고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 대열에 합류, 락 밴드 ‘슬리터-키니’에 참여,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 다. 2005년 자신이 감독한 영화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포함, 네 개의 상을 받으면서 인디 영화계의 우상이 되었다.

No One Belongs Here More Than You
(여기서 누구도 너를 대신할 수 없어)
Miranda July 지음,
Scribner사,
224쪽, 23달러

미국의 문학계에 경쾌한 문장의 신세대가 출현하고 있다. 사회정치적 비평에 힘을 쏟았던 거장들의 문학이 사라지고 나서 한동안 냉소와 절망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성행했으나 신세대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코믹 모드가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그 중심에는 문학계의 신데렐라인 미란다 줄라이가 있다. 첫 영화로 2005년 칸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녀가 단편 소설집을 출간했다.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은 이 소설집은 단편 소설에 주는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프랑크 오코너 상을 수상, 인터넷 세대의 새로운 문체와 감수성이 방금 도착한 것을 세상에 알렸다.

줄라이의 문장은 지극히 사적이고 친근하다. 개인의 심리적 구조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일인칭과 경쾌한 단문은 인터넷 세대의 쿨한 유머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어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버스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일인칭의 짤막한 단문들은 개인들의 내밀한 세계 깊숙이 독자를 인도한다. 거기서 줄라이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가 삶을 구원하는 장면들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열 여섯 편의 짧은 이야기로 채워진 이 단편집의 제목이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소설집의 등장 인물들은 모두 사회에서 좌절한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자리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영국의 윌리엄 왕자에 대한 환상의 사랑에 빠지는 사십대 중반의 여성을 묘사한 ‘머제스티’는 유머러스하다. 자기가 사랑하던 강아지가 죽어서 거의 정신이 나간 노파를 보고 난 주인공은 심란하다. 그러다 조깅 중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십대 소년에게로 마음이 끌린다. 개의 죽음을 보고 난 다음 윌리엄 왕자를 포기하고 가까이 있는 소년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이 여성의 고백은 따스하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코믹한 이야기는 ‘수영 팀’이다. 수영장이 없는 어느 한적한 시골 타운으로 이사를 간 주인공은 그 시골의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침대에 다이빙을 하고 부엌에서 거실까지 버둥거리며 수영을 하는 광경을 읽으면 요절복통을 하게 된다. 현대 문명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어떤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먼 도시로 떠난 풋내기 아가씨를 다룬다. 그에게는 친구가 세상의 모든 것이다. 그녀는 친구가 곁을 떠나자 핍 쇼 걸이 되어버린다. 주인공이 핍 쇼 걸이 된 것을 계기로 되어 친구는 다시 돌아온다. 음란한 장면이 많은데도 음란하지 않게 읽히는 것은 순전히 시적 문체의 힘 때문이다.

타인과의 소통이나 관계 맺기에서 실패하고 현실에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판타지들은 어떤 의미에서 퇴행적이다. 하지만 줄라이의 섬세한 눈길은 현실이 준 상처를 위로하고 고독한 개인들이 사랑을 찾아가는 방식이 판타지일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고급 문화의 엄숙성을 일소에 부치는 신세대 문학을 두고 탈정치적 퇴행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의 힘으로 사랑을 잃은 우리 시대에 대한 거대한 문명 비판을 수행한다.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시적으로.

이영준<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