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세계육상대회는 다가오는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신필렬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의 요즘 마음은 늦가을 날씨만큼이나 스산하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2011년 대구에 유치한 지 8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가시적인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육상선수권이 보통 대회인가. 흥행이나 주목도 면에서 여름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에 버금가는 지구촌 3대 스포츠 빅 이벤트의 하나다. 올림픽 금메달 수에서도 육상은 47개로 다른 종목을 압도한다. 달리고, 뛰어넘고, 던지는 ‘기본 종목’이란 배려에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를 떠올리며 지금도 감동에 젖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 때는 또 어땠는가. 이런 열광의 무대가 불과 4년 후 대구에서 펼쳐지는데 우린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니. 준비란 바로 좋은 재목을 찾아내고 기르는 일이다. 대구 대회 때 스타디움을 누빌 우리 선수가 보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경기장이나 시설 등 인프라는 벼락치기로 뚝딱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과거에도 우린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선수는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예선탈락 했더라도 응원인파가 거리를 붉게 물들였을까를. 남의 잔치에 흥이 날 리 만무하다.

한국육상과 세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가장 근접한 마라톤을 보자. 벨라이네 딘사모가 2시간6분50초의 세계기록을 세울 때만 해도 쫓아갈 만했다. 우리는 2시간8분대 초반을 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계기록이 2시간5분, 4분대로 단축되면서 이젠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42.195㎞를 100m 기록으로 환산했을 때 평균 17초대로 달리는 외국 선수들을 우리 선수들의 스피드로는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단거리에서처럼 사진판독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일이 드물지 않을 정도로 마라톤은 이제 스피드 시대가 됐다. 그런데도 우리는 2시간8분대는 고사하고 9분대 선수도 찾기 어렵다. 신필렬 회장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박정기 대한육상연맹 회장은 한 도인(道人)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메달을 노려볼 종목은 마라톤밖에 없기에 진흥책을 놓고 고민 중일 때였다. 도인 왈 “42.195㎞를 달리는 데 1시간이면 되지 무슨 2시간씩이나 필요한가. 비법을 보여주겠다”고 해 그를 만났다. 비법은 바로, 앉은자리에서 몸이 뜬다는 공중부양(空中浮揚)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도인을 자처한 그는 바닥에서 엉덩이만 들썩거릴 뿐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박 회장은 나중에 “급한 마음에 혹시나 해서 그런 사람까지 만나게 되더라”며 웃은 적이 있다.

3년째 육상연맹을 이끌고 있는 신 회장은 삼성전자 사장도 겸하고 있는 CEO다. 그는 “기업은 한 가지 목표가 정해지면 전 조직이 달라붙어 해내는데 세계육상은 아직 유기적인 조직체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때의 박정기 회장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효율적인 준비를 위해서는 정부와 육상연맹·대구시를 아우르는 조직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경기력 향상을 위한 방안이 나오면 이를 ‘원스톱’으로 정책에 연결시키기 위해서다. 육상인들은 지금 선수 발굴 단계부터 애를 먹는다고 하소연이다. 체력장도 없어지고, 학교 운동회도 폐지됐고, 체육시간도 있는 둥 마는 둥이어서 누가 달리기를 잘하는지, 누가 지구력이 좋은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육상연맹은 유망주를 뽑아 케냐에도 보내고, 우수 외국인 코치를 영입하는 등 애쓰고 있지만 연맹 차원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4년 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 우리 선수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관중이 들어올 리 만무할 것이다. 설사 동원한다 해도 무슨 열기가 있겠는가. 어렵게 대회를 유치한 만큼 남의 잔치가 되지 않으려면 정부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

신동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