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열린우리당 與黨 맞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정치의 구태를 불식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쳐 보이기 위한 여권의 의지와 노력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며 공감해 온 터다. 그런데 최근 파병안을 둘러싼 그간의 열린우리당의 행보를 보면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한마디로 여당으로서 맛있는 열매는 따먹고 입에 쓴 것은 뱉어 버리는 책임없는 정치를 여기서도 보는 것 같아서다.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는 국민에게 더 큰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문제삼고 싶은 것은 이라크 파병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중대한 국익을 둘러싼 정치권의 의사결정 과정에 있다.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고뇌 속에서 내렸다는 용단이 여당의 서투른 행보로 오히려 주고 뺨맞는 우를 범하는 것 같아 착잡하기만 하다.

이라크 파병안은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적인 정치적 신조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더 큰 국익을 고려해 개인의 신조를 후퇴하면서 내린 정치적 결단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대통령의 태도는 비난할 것이 아니다. 정치인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때에 따라서는 국익과 공익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신조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공리공담의 말장난이 아니라 눈앞에 전개돼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각기 상반되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절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결단의 연속이다. 정치인의 개인적 신조도 존중돼야 하지만 정치인의 신조는 더 큰 국익 앞에서는 양보할 수도 있는 유연성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인의 신조가 선비의 신조와 다른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여당이 파병안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당당하지 못하다. 물론 국회의원 각자의 정치적 소신이 타협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당의 리더십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당론을 밝혀야 한다. 만약 소속의원 개인의 소신에 맡긴다는 당론을 정한다면 여당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파병 후 훗날 불상사라도 나게 되면 그때 책임을 면하겠다는 얄팍한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와 그동안 논의가 부족했다면 지금까지 무얼하다가 이제 와서야 이렇게 다시 표류하는가. 왜 국회에 회부되기 전에 더욱 적극적으로 의사를 전달하지 않았던가. 야당도 아닌 여당을 자처하는 당에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이 점에서는 정부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진정 국익을 위해 파병이 불가피하다면 그동안 야당이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정책을 함께 하는 여당이 반대하고 있는데 이때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지금 협의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여당의 당론이 당당하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정부와 여당이 처음부터 이러한 교감을 해 왔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러한 결과에 대한 미필적 고의를 가졌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파병에 따른 책임은 야당만 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를 새롭게 하겠다는 마당에 우리가 바라는 정치인은 눈앞의 표만 의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국익을 위해 당당히 유권자를 설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정치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집단이기주의도 바로 이러한 근시안적인 정치인의 행보와 무관치 않다. 지금까지의 정치인은 책임없이 특권만 누려 왔으나 앞으로의 정치인은 진정 책임을 통감하고 이를 감수하겠다는 대승적 행보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 개인의 정치적 소신과 정당을 이끌고 있는 리더십의 정치적 소신은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다. 책임있는 정당의 리더십은 개인의 정치적 소신을 넘어 최선의 국익이 무엇인가를 두고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국익이 최고의 행동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는 냉엄한 국제현실 속에서 우리의 앞길을 맡길 수 있는 지도자는 책임도 기꺼이 떠맡을 준비가 된 자라야 한다.

윤대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