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근혜, ‘원칙의 입’을 열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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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대(對)박근혜 사과 회견을 했다. 이제 유권자는 박 전 대표의 입을 쳐다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약속한 정권 창출을 돕는 길로 나서고, 이회창 전 총재의 배반과 일탈을 호되게 꾸짖어야 한다.

한나라당의 마찰과 파행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결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당권과 내년 4월 총선 공천 문제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 이 후보 세력은 대선에서 승리하면 당을 새롭게 바꿀 것이라는 걸 암시했다. 실제로 이명박 세력은 박근혜 후보를 위해 뛰었던 인사들을 홀대하거나 좌천시켰다. 일부 지역에선 박근혜파 대의원을 교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양태를 보고 박근혜 진영엔 공포감이 퍼졌다. 이명박 측이 대선 승리 후 당권을 장악하고 대폭적인 공천 물갈이를 통해 박근혜 세력을 대거 제거할 거란 우려다. 박근혜 측이 이 후보를 제대로 돕지 않거나 반발한 핵심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박근혜 측은 이회창 전 총재의 탈당·출마로 이 후보가 위기에 몰리자 반격에 나섰다. 박 전 대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일부 인사는 당권·대권 분리론을 흘렸다. 대선 이후 박 전 대표 측이 당권을 쥐어야 한다는 뜻이다.

원칙으로 보면 이런 종류의 당권 싸움은 가당치 않은 것이다. 당원들은 지난해 7월 강재섭 대표를 선출했으며 그의 임기는 내년 7월까지다. 당이 대선에서 지면 강 대표는 정계를 떠나겠다고 한다. 승리하면 임기제는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당은 대표를 비롯한 집단지도체제(최고위원제)를 중심으로 객관적인 공천심사위를 만들어 내년 4월 총선에 임해야 한다. 대통령 당선자라고 해서 당헌을 무시하면서 당을 좌지우지하려고 해선 안 된다. 모든 일은 당헌·당규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면 의심도, 공포감도, 갈등도 사라질 수 있다. 이 후보는 어제 회견에서 “대표를 중심으로 당헌·당규가 정해 놓은 절차에 따라 대선과 총선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지만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이 후보는 아울러 “정권 창출 이후에도 주요한 현안을 협의하는 소중한 동반자로서 박 전 대표와 함께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뒤늦게나마 독선과 오만을 반성하고 박 전 대표에게 사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박 전 대표도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경선에 승복하고 정권 창출을 돕겠다는 자신의 약속이다. 그는 이회창 사태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경선에서 박빙의 2위를 하고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은 사람이 경선 결과를 파괴하고 당을 배반한 인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당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원칙의 박근혜’답지 않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면 그도 이회창씨처럼 BBK 사건의 틈새를 노리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경선 승복이 아니다. 박 전 대표는 이회창씨와는 다른 정치인이란 걸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