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이 쓴 '우리 안의 이분법' 양극단 치우친 세태 꼬집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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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진보.보수, 민족.반민족, 통일.반통일, 친미.반미, 친일.반일….

세상을 '모' 아니면 '도'로 보는 이분법(二分法)의 구도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질타한 책이 나왔다.

윤평중(한신대 철학과).권용립(경성대 국제정치학과).김창엽(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등 9명이 쓴 이 책은 '적 아니면 동지'라는 공식에 따라 서로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대화마저 끊는 이러한 야만성의 기원과 해법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모색한다.

편집진은 "우리의 사유체계와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양극단'의 대립구도, 그리고 한국 사회에 뿌리박힌 '진영론' 속에서 파괴돼 가는 우리의 삶과 사유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 안의 이분법'(생각의 나무)이라고 책 이름을 지었다.

책의 첫 장을 쓴 윤평중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집단이 "서로를 각기 수구냉전 집단과 민족 배반자라고 도식화해 딱지 붙이고, 자신들만이 객관적 진리를 독점한 듯 강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의 정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과 목표를 구체화시키는 지고의 실천적 활동'이라는 가치를 잃고 나치 어용학자 카를 슈미트가 주창한 '적과 동지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윤교수는 언론개혁 문제를 예로 들며 "우리가 하는 언행은 정당하며 저들의 발언은 그르다는 기계적 분류법으로 이행될 때 한국 사회는 새로운 몽매주의로 퇴화할 위기를 맞게 된다. 몽매주의의 절정은 특정 언론사에의 기고나 교류 자체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권용립 교수는 '친미.반미' 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반미는 정치적 신념으로서의 반미라기보다 일방통행으로 일관한 지난 50여년간의 한.미관계와 우리의 대미 콤플렉스를 교정하려는 역사적 요구"라고 정의한다. 그는 '친미'와 '반미'의 진영이 이러한 '정치적 반미'와 '역사적 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친일과 반일의 문제에 대해 "'친일파 청산'이 '민족'이라는 모호한 대상에 대한 귀속 의식과 충성 서약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 그만둬야 한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한 '일상적인 협력'이 현대 한국 사회의 식민주의적 상황을 재생산하고 있는 주범이라면 '청산'은 더욱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통일에 대해서는 "정말로 통일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부터 다시 논의를 해보자"(이우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고 제의하고 ,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여성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데 남성은 너무 많이 빼앗겼다고 느끼는 정서와 인식의 근원인 '성대결 신화'부터 타파하자"(황정미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고 역설한다.

저자들은 하나같이 '이분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처방으로 '대화'를 제시한다. 각기 자신의 '진영'에서 대포만 쏠 것이 아니라 '논쟁'이라는 벌판에 나와 부닥쳐야 한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토의하고 논변하는 과정에서 '수구 냉전 세력'이나 '민족 반역자'라고 딱지를 붙이거나, 과도한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는 언사와 행동을 최대한 줄이자"고 교전수칙(?)까지도 제안한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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