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권 인물' 시나리오 의혹 증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고액권의 도안 인물 선정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 관련 문화단체인 '문화미래 이프'는 7일 기자회견을 열고 "고액권 인물로 김구와 신사임당을 선정한 것은 헌법의 성평등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한국은행이 '김구는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고 통일의 길을 모색한 지도자로서 바람직한 인물상이며 신사임당은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며 "이는 '남성=국가' '여성=가족'이라는 전통적 성 역할을 답습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이 같은 화폐 인물 결정은 '성평등'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회부돼야 할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도 성명을 통해 신사임당 선정을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한은이 위촉한 화폐도안자문위원회의에선 "김구 선생보다는 안창호 선생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줬는데 결국 10만원권 인물로 김구 선생이 결정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에 따라 "사전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한 대학교수는 "자문위원 상당수가 역사적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논란이 적은 안창호 선생이 화폐 인물로 더 적합하다는 의견을 내놨었다"며 "실제로 후보 10명을 4명으로 압축하기 위한 투표에서도 안창호 선생이 6표, 김구 선생이 4표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종 결정은 정부와 한은이 내리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역할은 별로 없었다"고 덧붙였다.

올 5월 구성된 자문위원회는 한은 측의 이승일 부총재와 발권국장이, 민간위원으론 역사학자 3명을 비롯해 철학.사상사, 미술사, 과학사, 문학,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 각각 1명씩 위촉됐다.

이에 대해 한은 고위 관계자는 "자문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4명의 후보를 결정했고, 여론조사 등을 감안해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라며 "자문위원회 내부에서 누가 누구보다 선호도가 앞섰다고 얘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날 네티즌들도 한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300여 건의 글을 게재하며 인물의 부적절성과 한은의 독단적 결정에 반발하고 나섰다. 김구 선생에 대해선 역사적 평가에서 아직 논란이 많다는 것과 신사임당의 경우 시대상을 반영하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일부 네티즌은 "이순신 장군은 100원짜리 주화 앞면에 도안돼 있지만 사실상 누군지 분간도 안 될 정도"라며 "이순신 장군을 고액권 도안 인물로 승진시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이순신 장군을 승진시키고 그 자리에 김구 선생을 넣으면 논란이 그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도안 인물 발표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결국은 소문대로 결정이 됐다"며 "국민은 들러리였느냐"고 질타했다.

이번 기회에 100원을 1원으로 변경하는 것과 같은 리디노미네이션(화폐의 액면단위 변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네티즌도 많았다. 한은은 2000조원에 육박하는 광의유동성(L)을 외국 통계기관에 제공할 때는 '쿼드릴리언(quadrillion)'이란 표현을 쓴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도 10의 15승을 뜻하는 '쿼드릴리언'은 생소한 단어여서 한은이 영어사전까지 펼쳐 보이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한다. 우리 화폐의 액면 단위가 미국이나 유럽국에 비해 너무 커서 발생하는 일이다.

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