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어린이책] 어른들 욕심에 일침 준 통쾌한 풍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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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멍청이
공지희 글, 이형진 그림,
낮은산
212쪽, 8800원,
초등 고학년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는 책이 화제가 됐던 게 불과 3년 전. 이젠 그 4학년마저 “늦었다”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나이가 됐다.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 돌고, 기껏해야 피시방 정도를 숨 돌릴 곳 삼아 살아가는 이 시대 초등 고학년들의 일상이 단편동화 8편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지은이는 그동안 『영모가 사라졌다』『이 세상에는 공주가 꼭 필요하다』 등으로 요즘 아이들의 팍팍한 현실과 심리적 중압감을 묘사해온 공지희다.

#학원, 주무대로 등장하다

아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건 이제 학교가 아니다. 학교의 자리를 학원이 꿰찼다. “정말이지 가장 싫을 때는 방학 때다. 방학마다 ‘엘리트 특강’ ‘영재 종합 특강’ 등, 별별 특강반을 잘도 만들어 낸다.”(‘UFO를 기다리며’)

문제집 풀고 답을 맞추고, 또 문제집 풀고 또 답을 맞추고…. 아무리 날이 춥고, 비염이 심해져도 학원은 가야 하니,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학원에 안 가면 아이들 스스로가 안절부절못한다. “갑자기 나 혼자 외계의 다른 시간 속으로 뚝 떨어져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불안했다.” 표제작 ‘멍청이’의 주인공이 학원을 빼먹고 털어놓은 심정이다.

학교가 없어진 건 아니다. 몇몇 에피소드는 학교에서 일어났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편지를 썼고(‘멍청이’), 자기 꿈을 도화지에 그렸다(‘선주’). 포스터도 그리고, 체육시간에 줄넘기도 했다(‘내 겨드랑이에 생긴 일’). 또 예절교육 시범행사 준비로 청소와 미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세상에는 어린이가 필요한 법이다’). 공부 부담은 학원에 넘기고 전인교육의 장으로 우뚝 선 모양새다.

하지만 그 초라한 위세야 말해 무엇하랴. 청소시간, 사제 간의 대화가 이렇다. “학원 가야 해서 청소 못하겠는데요.” “다른 애들도 다 학원 가야 해. 청소 끝내고 가라.”(‘선주’)

#상상, 유일한 돌파구다

아이들이 숨막히는 일상에서 탈출하는 길은 딱 하나다. 바로 상상이다. 행복한 별에 데려다 준다는 UFO도(‘UFO를 기다리며’), 초콜릿빛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도(‘내 겨드랑이에서 생긴 일’) 상상 속에서는 어엿한 현실이다.

‘세상에는 어린이가 필요한 법이다’에서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한꺼번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유가 재미있다. 너무 바쁜 아이들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하느님이 아이들을 어딘가로 가서 푹 쉬게 하셨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학원 원장은 ‘우리 학원에 문제가 있나? 애들 성적이 안 올라서 다 같이 짜고 그만두려고 하는 건가? 안 그래도 요즘 애들이 점점 줄어서 걱정인데, 이렇게 갑자기 한 명도 안 오면 나는 어떻게 해’라며 걱정이고, 전날 밤 아이를 혼낸 명준이 엄마는 ‘이 녀석 분명히 나한테 반항을 하는 거야. 어린 자식이 벌써부터… 어디 이번 참에 완전히 버릇을 들여놔야겠어’라고 벼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진짜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안 순간, 겁에 질린 어른들은 ‘본심’을 털어놓는다. “이제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사나, 이제 우리는 무슨 희망으로 사나.” 그 결론만큼은 상상이 아니다. 세상의 ‘재미’이고 ‘희망’인 아이들이 통쾌한 풍자에 작은 위안을 얻으리라. 기대된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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