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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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나는 정말이지 공부를 안해서 못하는 거지 열심히 해도 머리가나빠서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려고 했다.그러면 학교에선 선생들의 칭찬을 듣고 집에서는 효자가 되고…그러다가 덩달아 좋은 대학에도 가고 그러면 앞 날이 창창 빵빵할 거였다.그거 하나 잘하는 것으로 세상에 그렇게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주어지는 게 공부말고는 없을 거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왜냐하면 다른 아이들도 모두 공부를잘할 때 주어지는 부상과 특혜에 대해서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거였다.그러니까 다들 공부를 잘하고 싶어서 안달을 떨고 그러다보니까 서로 피나는 경쟁을 붙어야 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거였다. 시험칠 때 답안지에 써내는 것 말고는 평생동안 아무 쓸데도 없는 것들을 누가 더 잘 외우는지 더 많이 아는지 시합을 하면서 아까운 청춘을 불살라버리는 거였다.가령 동쪽으로 10㎧로 달리는 관측자가 북쪽으로 30㎧로 달리는 물체를 볼 때물체의 관측자에 대한 상대속도의 크기를 아는 것이 정말 얼마나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누구든슬퍼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거였다.
하지만 공부란 종교와 같은 거였다.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서는 결코 잘 할 수가 없다고 했다.종교란 우선 믿고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우선 잘 하고 보면 만사가 편해지는 게 공부였다.그래서 나도 결심을 한 거였다.악 동들끼리 각자의 고민을 아무리 털어놓고 나누자고 해봐야 뭐가 해결이 되는것도 아니었으니까.그러니 차라리 범생처럼 공부에 내기를 걸기로작정한 거였다.
그런데 내 결심은 초장부터 숱한 암초에 시달려야 했다.개학하고 두번째 맞은 수요일에 성식이가 자살한 사건이 그중 하나였다. 성식이는 우리반에서 가장 착하고 얌전한 녀석이었는데 느닷없이 죽어버린 거였다.우리는 목요일 아침에 그 소식을 들었다.성식이의 죽음에 관련된 온갖 소문들이 떠돌아다녔다.신촌 열네통 아치들에게 시달리다가 못견뎌서 죽어버린 거라는 게 가장 유력한소문이었다.그렇지만 달리 당장 확인할 방법도 없는 말이기는 했다. 나는 특별히 성식이와 친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그렇지만1학년때 한번은 내가 계단에서 뛰어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굴러떨어졌을 때,여기저기가 깨져서 양호실에 누워 있는데 내 야광시계를 주워서 갖다준 게 성식이었다.그때는 우리가 서로 다른 반이었기 때문에 아직 서로 한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게 전부였다.우리는 사실 더 이상 친해진 것도 아니었다.2학년이 돼서 같은 반이 되기는 했지만 성식이와 나는 원래 노는 물이 달라서 같이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거였다.
나는 방과 후에 악동들을 선동해서 성식이의 빈소인 병원 영안실로 몰려갔다.지하실이었는데,성식이의 사진에 검은 테가 쳐져 있었고 향내음이 진동했고 코끝이 벌건 성식이 엄마가 넋을 놓고앉아 있었다.우리는 돈을 갹출해서 산 흰꽃을 성 식이의 사진 앞에 놓아주고 나왔다.
『저기 달수 오빠 맞지요….』 돌아보니 하얀 상복을 입은 꼬마 계집애였다.
『난 성미라구… 성식이 오빠 동생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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