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미술작품 국내전시중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들 진열장 부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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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두건의 일본미술전 도중 일어난 한 우발적 사건을 통해 이곳 역시 문화전쟁의 시대,그것도 첨예한 이해가 걸린 韓日간의 문화전쟁에서는 격전의 장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지난 2일 오후5시쯤 평범한 관람객이라고는 볼 수 없는 한떼의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아 전시작품의 진열장을 부수는 해프닝을벌였다.낯선 방문객들은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회원들로서 자신들의 문제에 성의있는 해결책을 보이지 않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일본전통공예전 전시장에 모여든 것이다.
1일 개막된 현대일본전통공예전과 현대일본디자인전은 2년전 일본에서 열린 한국문화통신사 행사에 대한 답방형식으로 마련된 전시.지난해 말부터 일본측이 상당한 공을 들여 성사시킨 이 전시회는 당초 국립현대미술관측이 문화행사의 상호주의를 명분으로 92년 한국문화통신사 행사가 받은 대접만큼만 대접하겠다는 뜻에서완곡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건이 나자 현대일본전통공예전은 잠정 폐쇄됐으며 일본의 관련전문가들이 급거 방한,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들과 출품작의 이상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부 작품에 미세한 흠이 난 것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들은 일본측에 단지 「유감」의 뜻만을 표시했다.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예술작품은 똑같이 어디서나 소중히 취급받아야 한다』고 전제하면서『초대전 자리를 만든 주최측으로서 유감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공동주최자로서 일본에서 급히 날아온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관계자역시 『본국에 상의한 후 다시 연락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처음부터 상호주의 원칙에 어긋난 전시라며 「유감」을 표시한 국립현대미술관과 지나치게 사건화할 경우 국립현대미술관 진출의 의미가 퇴색할 것을 우려한 일본측이 서로 탐색을 거듭하면서 찾아낸 타협점이 「전시계속」이다.
이 전시는 양국 미술관 관계자들의 협의를 거쳐 조만간 다시 열릴 예정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사건을 통해 『교류는 하되상호주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미술계에 일본문화 유입에 대한 한가지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데시가하라 히로시(刺使河原宏)전」「일본현대도예전」등 지금까지 네건의 일본미술전을 열었던 국립현대미술관측의 한 관계자는 『일본이 관련된 전시는 항상 힘들다』며 『아직까지 문화적.미술적 측면만을 고려할 수 없는 것이 일본관련 전시』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국립현대미술관은 일본문화 개방을 앞두고 철저히상호주의 원칙으로 대응한다는 뜻에서 96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일본에 소개하기 위한 교류전을 계획하고 있다.
〈尹哲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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