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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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개학하고 둘쨋날 방과 후에는 어디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악동들을 따돌리고 병원으로 갔다.점심시간에 서무 보는 누나에게 교장선생님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을 알아둔 거였다.나는 악동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녀석들은 나를 놀릴 게 뻔했으니까.
나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걸어가면서 무얼 사가지고 가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개학하고 며칠동안은 주머니가 그런대로돌아가는 거였다.새로 사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거기서 으레 조금씩 남겨먹을 수가 있는 거였다.다른 책은 그렇 지 않은데 참고서는 정가보다 싸게 파는 거였다.그래야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걸 참고서 만드는 분들도 다 알고 있을 거였다.
계갈보가 이야기해 준대로 교장선생님께 폭죽을 사다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건 근사한 발상이었던 것처럼 들렸었다.정말이지 평생을 노처녀로 사시는 교장선생님에게 무슨 낙이 있겠는가.언제 한번 마음 속에서라도 폭죽을 터뜨릴 일이 계셨을까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하지만 점잖은 교장선생님이 병실에서 폭죽을 빵 빵 터뜨리고 계신다면 간호사들이 미쳤다고 쑥덕거릴 일이었다.역시 꽃을 사다드리는게 무난할 것 같았다.나는 교장선생님의 나이만큼 장미를 사다드려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꽃집에 갔는데 장미 56송이는 너무 비쌌다.맞아,그래서 젊은 여자가 좋다고들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혼자 씨익 웃었다.
『아니 달수가 여기 웬일이니.』 교장선생님은 혼자서 무슨 책을 읽고 계시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깜짝 놀라셨다.반기시는 모습이 너무나 뚜렷해서 역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회 때 안나오셔서 물어봤더니…아프다구 그러셔서요.』 환자복을 입은 교장선생님은 학교에서와는 완전히 달라보였다.어쩐지 아주 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거였다.
나는 교장선생님이 가리키는대로 침대머리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꽃을 가지고 왔는데요,정문에서 수위 아저씨한테 빼앗겼어요.병원 규칙이 꽃은 못가지고 들어오게 돼 있대요.장미꽃 다섯 송이하구 안개꽃하구 섞어서 가지고 왔는데 말이에요.』 『예쁘겠구나.집에 갈 때 찾아가지구 가서…네 방에 꽂아둬.난 달수가 갖다준 장미 다섯 송이하구…안개꽃이 저기에 있는 걸루 생각할게….그래,방학은 잘 지냈니.』 교장선생님은 말씀하다가 중간에 몇번인가 기침을 하셨다.
『사실은 약간…약간 복잡했어요.선생님.』 『뭐지…?말해봐.내가 도움이 될까.』 『아니에요.전요…오늘은 선생님이 걱정돼서 온 거라니까요.』 나는 그 병실에서 10분쯤 있었다.교장선생님의 기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기도하였다. 『달수야,내가 니 팬이라는 거 모르지? 넌 나중에 좋은 작가가 될 거야.』 『아뇨.전요 사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거든요.웃기죠.저같은 문제아가 선생님한다니까요.그치만…저 공부해보기로 작정했어요.정말요.저…그만 가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잔잔하게 웃다가 손을 내미셨다.손을 잡아드렸는데 의외로 따듯한 손이었다.공부하기로 했다고 말한 게 어쩐지 쑥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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