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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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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이 먹는다고 모든 게 원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화예술계가 그렇다. 대부분 천재 예술가들은 요절해서 신화가 됐다. 제임스 딘과 커트 코베인, 짐 모리슨, 김현식과 김광석은 일찍 세상을 등져 영원히 팬들 가슴에 남았다.

영화 감독의 최고작도 대부분 젊은 시절에 나온다. 이후 작품은 초기작의 동어반복이거나 명성의 재확인일 때가 많다. 가령 아카데미와 영 인연 없던 마틴 스코시지(65)가 5수 끝에 올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을 휩쓸었을 때 수상작 ‘디파티드’가 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감독의 영화인생 전체에 주는 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예외도 있다. 배우 출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77)가 대표적이다. 팔순을 앞두고도 아직 현역이며 점점 작품이 좋아진다는 평이다.

서부영화와 형사물의 마초 배우로 출발한 그는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 데뷔한 후 나이를 먹을수록 묵직한 통찰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다. 93년 자신의 출생 장르인 서부극의 관습을 비튼 ‘용서받지 못한 자’, 2005년 ‘밀리언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자 세월과 무관하게 꾸준히 진보하는 ‘젊은 감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문학은 아마도 가장 효과적으로 나이가 자산이 되는 장르일 것이다. 나이 먹으면서 깊어지는 통찰과 경륜이,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들은 따라잡지 못할 경지를 펼쳐 보인다. 가령 노인 하면 떠오르는 소설인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63세에 발표한 단편이다. “생전에 쓰기를 벼르다가 마침내 쓰고야 만 작품”이라는 게 작가의 말이다. 대어를 낚으려 분투하는 늙은 어부가 삶의 무상함에 순순히 승복하는 모습이 존재의 고결함을 깨닫게 하는 고전이다. 53년 퓰리처상, 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양차 대전을 겪으며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스타 작가였지만 젊은 헤밍웨이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깊이가 묻어난다.

이때 노인은 그저 나이 많은 이가 아니라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삶을 성찰하는 존재다. 인생의 부침 속에서 체득한 경륜과 지혜로움으로 젊은이들에게 좌표가 되는 존재다. 존경하는 원로로 불릴 만한 존재다.

최근 한 노정치인의 갑작스러운 대선 출마설이 연일 화제다. 대선정국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흥행 정국으로 바뀌었지만 과연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뒤늦게 뛰어든 모양새는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존경할 만한 원로가 많은 사회가 그립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