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2. 낙제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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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공부라는것을 가르쳐준 외당숙 김소열 아저씨<左>와 경기중 1학년 때(1949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쓴약을 먹는 것보다 공부하기가 더 싫었다. 맨땅이었던 당시 서울의 동네 골목길에서 공을 차고 아이들과 떠들며 노는 것이 천성에 맞았다. 이 때문에 재동국민학교에서 시험만 봤다 하면 낙제생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입학 전까지 나에 대한 집안어른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아들이 귀한 황씨 가문의 3대 독자로 태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민학생이 되기 전에는 총기가 있다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놀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학교 시험 성적은 거의 꼴찌를 면치 못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동네 형이 “해방 후에는 이제껏 공부한 것이 모두 무효고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말해 희망을 갖기도 했었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기역 니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일제 시대 때보다 공부를 더 못했다. 광복 전에 공부를 잘하던 아이들의 성적이 여전히 좋아 나는 낙제생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4학년 마지막 학기부터 우등생이 됐다. 낙제생 황병기가 우등생이 되고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게 된 데는 우리 집에서 묵었던 한 친척 아저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저씨의 이름은 김소열. 외당숙이었다. 전북 무장리에 살던 아저씨는 광복 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시골에서 국민학교 선생님을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하숙을 할 형편이 안 됐던 아저씨는 우리 집에서 살았다. 부모님들은 하숙비 대신 나의 가정교사 역할을 주문했던 모양이다.

아저씨와 우리 어머니 사이에 오갔던 대화 내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저씨가 처음 우리 집에 온 날이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서 한 학기 만에 우등생 못 시킨 아이가 없었다”고 운을 뗐다. 나는 선 채로 귀를 기울이며 ‘그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나다’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아저씨는 단서를 달았다. “대신 제 교육 방식에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그 뒤로 나는 아저씨를 볼 때마다 도망을 다녔다. 밥을 먹다 도망친 적도 있었다. 아저씨는 나를 붙잡을 생각도 안 하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동네 아이들과 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내가 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어른을 흉내내지 않고 어린아이답게 잘 쓴다”는 것이었다. 내가 듣기에도 그럴 듯한 칭찬이어서 그 후로는 그를 봐도 도망가지 않았다. 아저씨와 나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다. 내가 공부에 재미를 붙여 “더하자”고 졸라도 그는 “그만하자”고 잘랐다. 그의 작전이었다. 나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져만 갔고 어느새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 됐다.

 국악을 시작하게 된 데에도 아저씨의 영향이 크다. 어느 날 국도극장에서 ‘춘향전’을 함께 봤다. 처음 보는 창극이 지루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정말 좋은 구경을 했다. 네가 이 맛을 알려면 한참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아저씨가 말한 그 ‘맛’을 반드시 일찍 찾아보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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