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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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떠난 자와 남는 자(8) 마른 풀밭에 서서 길남은 방파제 너머를 바라보았다.멀리 저녁빛 속으로 멀리 아슴푸레하게 육지가 바라보였다.맑은 날이면 좀 더 어둡게 계곡의 선이 다가서고 나무빛깔까지 바라보이는 땅이었지만,어둠이 내리고 있 는 건너편 땅은 넘실거리듯이,솟아 오른 산과 구릉이 잿빛으로 젖어가고 있었다.땅.그렇다.여기가 아니다.저곳이 땅이다.그는 마음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렇다.건너가야 한다.저곳은 다만 땅이 아니다.생명이다.저곳엘 가야 목숨이 목숨다워지는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다.
가자.가기로 한다.
길남은 어금니를 물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다.이것이 마지막이다.이제 뒤돌아 볼 것도 두리번 거릴 것도 없다.
이 결심이 흔들리거나 깨질 것이라면,차라리 죽자.목 매달아 죽은 사람이 있었지.죽어서까지 더럽혀질게 뭔가.죽어서까지 차마못 들을 소리 들어가면서 왜놈 눈에 눈흘김 당하고,주검까지 그손에 더러워질 것도 없다.돌덩이 하나 발목에 매달고 방파제에서뛰어내리면 되는 거 아닌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기에서의 하루하루가 살아있는게 아니라면,떠나야 한다.사람이기에,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사는게 아닌가.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비바람 치던 어제가 가고,그런 긴 밤이 지나가고 안개 속에 개어오는 아침처럼 그렇게 마음이 가라앉아 왔다.
아버지.
아주 오랜만에 길남은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아버지,접니다.못난 아들입니다.이렇게 되거라 하시던대로 되지도 못했고,이렇게 살거라 하는대로 살지도 못하고 있는 못난 아들입니다.그러나 저 바다를 건너려는 저만은 아버지도 탓하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아버지 또한 그렇게도 저 바다를 건너려 하셨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길남은 조금씩 더 어두워져가는 먼 육지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면 화순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무슨 말을 해야 하나.함께 갈 수도,그렇다고 두고 갈 수도 없는 이 심정을 어떤 말이있어서 전한단 말인가.
함께 가자면,그래야겠지.나도 너를 두고는 못간다.그렇게 말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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