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아들이 필요 없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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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가수 이적의 어머니로도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씨 얘기다. 30년 전 아들 셋을 데리고 집 밖에 나가면 반응이 한결같았다. “밥 안 먹어도 배 부르겠네.” 그런데 그 부러움이 10년 전쯤부터 슬슬 바뀌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시골 할머니들마저 이렇게 말한단다. “아이고 어쩌다가…, 노후에 쓸쓸해서 어쩌노.”

주부 중 절반은 아들이 없어도 괜찮다고 응답한 조사가 화제다. 아들이 필요하다는 경우는 열 명 중 한 명뿐이었다. 사실 ‘XXX 시리즈’로 회자되는 우스개는 일찍부터 이 같은 세태를 예언했었다.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못난 아들은 내 아들’ ‘아들은 낳을 땐 2촌, 대학생 땐 8촌, 장가 가면 사돈의 8촌!’ ‘며느리의 남편을 아들로 여기는 이는 미친X’….

조사 결과가 낯선 게 아니었다. 그래도 한눈에 보이는 통계는 우스갯소리와 다르다. 전통적 가족제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 앞에서 더 거세게 밀어닥칠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가슴 허한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의식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올 봄 통계청 발표를 보면 2006년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수)는 첫째아 105.6, 둘째아 106.0으로 정상 범주(103~107)에 속했다. 하지만 셋째아(121.8), 넷째아(121.6)로 넘어가면 여아 낙태의 혐의가 분명해 보인다. 아들·딸 구별 없다고 외치면서도 명절 때면 시가에서 차례 지내고 한바탕 손님 치르고 나서야 친정 방문이 가능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많이 변했다. 처가와 친정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화기애애한 대가족은 대부분 처가 식구 모임이다. 할머니보다 외할머니가, 고모보다는 이모가 가깝고 집안의 시시콜콜한 대소사는 친정 부모와 의논하는 게 다반사다. ‘신(新)모계사회’가 도래했다는 주장이 무리도 아닌 것 같다.

아들이 대를 잇는다는 관념은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자고 할 때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아들에게 제사를 기대하거나 노년을 맡길 ‘노후보험’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들은 곧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백 번 양보해 든든한 버팀목으로만 있어줘도 좋으련만 이마저도 기대를 저버리기가 십상이다. 한 어머니는 아들과 집안일을 의논하다 “색시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대답에 ‘장가 간 아들은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임을 절감했다고 했다. 딸은 살갑기나 하지, 아들은 아무짝에 소용없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지 않을 수 없다.

처가와 친정에는 엎어지면서 본가와 시댁에는 ‘의무방어’만 하는 아들·며느리를 보면서 아들 무용론은 가속도를 더해가는 듯하다. 서울 압구정동에는 주민들이 속칭 ‘시부모 호텔’이라고 부르는 호텔이 있단다. 어쩌다 고향에서 시부모가 상경하면 성가시다며 이곳에 모신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일이지만 돌아보니 정도의 차가 있을 뿐 우리 친족 관계는 실리만 추구하는 기생적 부모-자녀 관계로 정착된 듯하다. 안 받고 안 주는 서구적 부모-자식 관계와도 다르다. 얻을 게 있으면 시댁·친정, 또는 친가·처가를 가리지 않고 자기 잇속을 챙기면서 의무와 책임은 외면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다시 옛날 가족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친족 관계 변화의 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은 어렵고 힘없는 구성원을 보살펴주는 돌봄 공동체다. 딸·아들 구별이 의미를 상실했듯이 시부모·친정 부모, 친가·처가를 나누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부계·모계를 아우르는 양계적(兩系的) 가족, 부모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세대 통합적 가족은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하는 새로운 가족 모델이다. 실리와 책임, 성숙함과 균형감각,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이 적절히 어우러지면 자연스레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