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행정에 쇳물 기업 몰려 지역경제 대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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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시가지가 공존하는 당진읍 전경. 서해안 철강벨트의 형성으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 자 사진 뒤편의 원당리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당진=김형수 기자]

현대제철 제강부에 근무하는 김보현(40) 계장은 뜨거운 쇳물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에너지가 넘친다. 쇳물에 대한 그런 열정이 없었다면 당진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 계장은 1994년 한보철강에 입사해 파일을 박는 일부터 했다. 공장이 가동된 지 2년여 지나자 한보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한보는 97년 초 최종 부도를 냈다. 3000여 명에 달하던 한보철강 직원은 500여 명으로 줄었고, 협력업체 30여 곳이 연쇄부도를 맞았다.

김 계장도 98년 말 회사를 그만뒀다. 상여금 없이 기본급만 달랑 나오는 월급으로는 가정을 꾸려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상황버섯을 재배하는 형의 농장으로 이주했다. 농장에서 기반을 닦고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러던 2004년 12월 말 현대제철 인사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보철강을 인수하고 직원을 모집 중이니 관심이 있으면 합류하라는 연락이었다. 아내는 "새로운 생활이 부담스럽다"며 당진행을 거부했다. 그러나 김 계장의 머릿속은 벌건 쇳물로 가득 찼다. 자신이 세운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도 궁금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 '철우'들과 뜨거운 포옹도 했다. 당진이 변했다. 2000년 서해대교가 완공되면서 당진은 서울까지 한 시간 거리인 산업 요충지로 바뀌었다. 현대제철을 비롯해 현대하이스코.동국제강.동부제강.휴스틸.환영철강 등 굵직한 철강업체가 들어섰고 100여 개의 철강 관련 업체가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 이제 당진은 '서해안 철강 벨트'로 자리 잡았다.

◆몰려드는 사람과 기업=서해안고속도로 송악IC에서 빠지자 곧바로 산업단지로 접어들었다. 곳곳에 파일을 박는 항타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덤프트럭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산업단지를 벗어나 당진읍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아파트 건설현장이 있었다. 당진군청 공보실 김낙기 주사는 "인구가 크게 늘면서 아파트 수요도 함께 늘어나 분양가가 평당 600만원 이상"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강북 수준이란다. 분양 예정인 아파트가 15개 단지에 6000여 가구다. 분양하면 대부분 2순위에서 마감된다는 것이 김 주사의 설명이다. 당진읍의 신시가지로 불리는 원당리에는 4~5채의 모델하우스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여서 이 일대의 개발 열기를 가늠케 한다. 민종기 당진군수는 "올해 안으로 2개 읍 인구가 5000명 늘어나면 내년에는 시 승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도농 복합 형태의 시로 승격하려면 2개 읍의 인구가 5만 명을 넘거나 전체 군 인구가 15만 명 이상이어야 한다.

인구가 불어난 가장 큰 원인은 기업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2004년 당진군이 기업을 유치한 건수는 59건. 그러나 2005년 이후 매년 100개 기업을 넘기더니 올해는 이미 200개를 돌파했다.

오리고기 식당을 운영하는 이무주(40)씨는 요즘 매일 싱글벙글한다. 읍내에서 설렁탕집을 13년간 하다가 인구가 늘어가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오리고기 집을 열었는데 '대박'이 났다. 외환위기 시절 한 달 매출 200만원도 힘들었으나, 이젠 하루 매출이 200만원을 넘어선다. 이씨는 "인구가 많다 보니 읍내에서 김밥집을 열면 하루 70만원 매상을 보장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발로 뛰는 지자체=당진군은 매년 서너 차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당진군 투자 유치 설명회를 열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기업 하기 좋은 고장'이니 투자해 달라며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올해 3월 연산 150만t 규모의 조선용 후판 생산공장을 착공한 동국제강 변철규 전무는 "조금이라도 빨리 인허가를 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당진군 공무원의 모습은 확실히 여타 공무원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기업을 끌어들이려면 인프라를 잘 갖춰야 한다. 당진군은 2002년 33.7%였던 상수도 보급률을 지난해 41%까지 끌어올렸고, 도로 길이도 2002년 436㎞에서 지난해 451㎞로 늘렸다. 당진군 윤대섭 부군수는 "산업단지에 들어오는 업체들의 임대료를 반값에 제공하다 보니 아직 재정 자립도는 많이 좋아지지 않았다"며 "그러나 기업이 늘어나면 주민의 살림살이는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당진에 철강업체가 몰려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지리적인 강점 때문이다. 서울.경기에 인접해 있고 연안을 통해 영.호남권의 철강도시와 물류가 원활하다. 특히 당진항이 서해에서는 보기 드물게 수심이 깊은 심수항이어서 20만t급 선박도 접안할 수 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도 큰 이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의 연쇄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서해안 철강벨트의 중심은 단연 현대제철이 추진 중인 일관제철소다. 지난달 27일로 착공 1주년을 맞았다. 430만㎡ 넓이의 부지 조성 공정률은 70%를 넘어섰다. 동국제강은 3월 조선용 후판 생산공장을 착공했고, 동부제강은 6200억원을 투자해 전기로 공장을 짓기로 했다. 제약회사인 중외제약도 당진에 링거액 등을 만드는 최첨단 수액공장을 짓고 풀가동 중이다.

당진=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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