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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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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름이 드높았던 명망가 사안(謝安)은 꽤 낭만적인 인물이었다. 벼슬자리에 잠깐 올랐으나 무료함을 떨치지 못해 바로 그만뒀는가 하면, 빼어난 산수를 찾아다니며 시작(詩作)에나 몰두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중국 장강(長江) 남쪽으로 처음 통일 왕조가 수도를 옮긴 게 동진(東晋:317~420) 때다. 강북의 명문이었던 사안의 집안도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따라 동진의 수도인 지금의 난징(南京)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수재였지만 사안은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인 왕희지 등과 함께 자연을 유람하고 즐기는 데 몰두했다. 그 능력이 빼어난 것을 알고 있던 정치권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 ‘러브콜’을 했지만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한 전진(前秦)의 부견은 동진으로 무력을 집중했다. 전진의 90만 대군이 강남으로 향하면서 위기감은 고조됐다. 강남이 북방 유목민족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동진의 군대는 기껏해야 20만. 전진의 부견이 “우리 군대의 무기인 채찍을 던져도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했던 ‘투편단류(投鞭斷流)’의 성어까지 나왔으니 양 진영의 세력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국란을 앞에 둔 동진의 정치권은 사안을 다시 찾았다. 당시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세상에 나서지 않던 사안도 결국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승상의 자리에 올라 전진의 대군에 맞서 치밀한 전략과 병력 운용의 묘를 보인 그는 위기에서 벗어난다.

‘비수(淝水)의 전쟁’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싸움에서 동진은 전진의 70만 병력을 몰살시킨 대첩을 거둔다. 산수에 젖어 있던 사안이 동산에서 나와 다시 일어섰다는 내용의 ‘동산재기(東山再起)’라는 고사의 줄거리다.

사안의 개성과 유명 전역(戰役)에 관한 드라마틱한 내용이 서로 얽히면서 사람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성어로 자리 잡았다. 현장에서 은퇴한 사람이 자신의 전 직종으로 복귀할 때 흔히 사용하는 ‘재기’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가 화제다. 한나라당이 내세운 후보가 엄연히 활동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의 재출마가 합당한 것인지 묻는 여론의 목소리가 높다. 재기는 사안의 예에서처럼 합당하고 절박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의 출마가 사실이라면 이회창 전 총재는 한국의 정치판을 명분과 원칙이 없어도 되는 곳으로 보게 된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미덥지 않은 한국 정치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