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공기업, 두려워하던 '민영화' 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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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이라크 석유부 공무원 15명이 이달 19일 경기도 분당의 대한송유관공사를 찾았다. 효율적인 송유관 운영에 대해 한 수 배우기 위한 방문이었다. 공사 측은 이들에게 경영 노하우를 전해 주고, 이라크 석유시장에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7년 전만 해도 송유관공사는 송유관 망을 깔고 앉아 수수료나 챙기던 공기업이었다. 방만한 경영으로 매년 2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냈다. 국민 세금을 축내던 곳이 민영화 후 달라졌다. 공사는 정부 지원이 끊기자 자체적인 기술 개발로 살길을 찾아 나섰다. 이를 바탕으로 해외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송유관공사의 순이익은 200억원을 넘었다. 민영화 직후 20% 가까이 줄였던 인력도 다시 그만큼 늘렸다. 일거리를 찾아내고 그에 따라 직원 채용을 늘린 것이다. 심규찬 기술영업팀장은 “공기업 시절에는 적자로 늘 고용 불안에 떨었는데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은 지금은 일 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미운 오리새끼’로 불렸던 부실 공기업들이 민영화를 거치면서 ‘백조’로 거듭난 경우다.

◆돋보이는 민영화 사례들=1950년대 한국 수출의 절반을 도맡았던 대한중석(현 대구텍)은 공기업의 대표주자였다. 80년대 값싼 중국산 텅스텐이 들어오면서 이 기업은 적자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94년 옛 거평그룹으로 넘어간 뒤 군살 빼기 작업에 들어갔다. 광산업을 접고 텅스텐을 활용한 절삭공구 전문회사로 거듭났다. 알짜 회사로 변신하자 98년 세계적인 공구회사인 이스라엘 IMC그룹이 3억 달러에 인수했다. 대구텍은 또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이 사들인 한국기업 1호이기도 하다. 버핏은 지난해 IMC를 인수했다. 대구텍의 지난해 매출은 2706억원, 영업이익은 615억원이다.

담배인삼공사와 재보험공사의 민영화도 두려움 속에서 진행됐다. 숱한 외국 사례처럼 십중팔구 해외 기업에 먹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KT&G(옛 담배인삼공사)와 코리안리(옛 재보험공사)는 아시아 시장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KT&G는 생산량의 40%를 세계 4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코리안리는 아시아 1위이자 항공보험 분야에선 세계 1위다.

99년 63일간의 파업 기록을 세운 옛 한국중공업. 2000년 두산그룹이 인수한 뒤 적자였던 제철·화공·시멘트 사업을 접고 발전·담수설비·건설사업에 주력했다. 이 회사는 중동·아프리카 산유국의 발전소·담수설비 공사 주문이 몰리면서 주가가 7년 동안 30배나 뛰었다. 시가총액이 국내 간판기업 중 하나인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7위로 뛰어올랐다.

민영화에 따른 부작용도 우려됐으나 기우로 끝났다. 송유관공사·KT(옛 한국통신)가 민영화되면 기름 수송료와 전화요금이 오를 걸로 예상됐다. 하지만 민영화 뒤에도 수송료와 전화요금은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약간 내렸다.

◆일석이조 민영화=김대중 정부는 포스코·한국통신·담배인삼공사 등 8개 공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정부 금고에 16조4848억원을 채워 넣었다. 5년 동안 공기업 지분 매각 수입은 21조원을 넘었다. 이는 올해 근로소득세의 두 배 규모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금융·기업 구조조정에 100조원 이상의 공적 자금을 쏟아 붓고도 버텨낸 데는 공기업 매각 수입이 한몫했다. 공기업 민영화로 부실 공기업에 대한 세금 투입 부담도 사라지면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정반대 길을 걷고 있다. 4년간 공기업 매각 수입은 3조원에도 못 미친다. 김준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민영화 중단으로 공기업의 내성을 키워 주고, 버티면 산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우려가 있다”며 “민영화가 재개되면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복지에 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경민·박혜민·윤창희·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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