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유류세 인하가 고유가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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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국제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이 배럴당 90달러를 돌파하면서 ‘국제유가 100달러 시대 진입론’이 현실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원유의 80% 이상을 중동에서 수입한다. 이러한 중동산 원유의 기준가격 역할을 하는 두바이유가도 지난주 배럴당 79.59달러까지 오르면서 올 들어 12번째로 역대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연초에 이상난동에 따른 난방유 수요 감소로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하락했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에만 30달러 이상 폭등한 셈이다.

국제유가의 고공비행은 크게 세 가지 요인이 한꺼번에 맞물리면서 발생한다. 우선 근본적으로 수급이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최근 3~4년 동안 고유가 추세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중국·인도 등의 석유 수요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매년 두 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블랙홀처럼 세계의 에너지자원을 빨아들인다. 게다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조금만 가격하락 기미가 보여도 산유량을 줄이는 등 ‘고유가 유지 정책’을 펴 지난 3분기에 세계 석유 수요가 하루 46만 배럴 정도 공급을 상회하는 초과수요 현상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수급불균형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차익을 노리고 국제석유 시장으로 대거 유입되고 있는 투기자금은 유가상승 폭을 확대시켰다. 특히 미국이 9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파문을 진화하기 위해 9월 연방금리를 내린 이후에는 달러가치 하락세가 가속화하면서 투기자금이 금융시장에서 원유 등 실물시장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유가급등의 또 하나 원인은 단골처럼 등장하는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이다. 이번에는 터키가 쿠르드족 분리주의 세력을 겨냥해 이라크 북부를 무력 침공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실어 나르는 송유관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어 터키의 공습이 석유 공급에 차질을 줄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유가 상승세가 쉽게 꺾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OPEC이 11월부터 증산한다고 하지만 지켜질지 의문이고, 증산 규모도 수급불균형을 해소할 만큼 크지 않다. 또한 미국의 경제성장세 둔화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으면서 이달 말 추가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달러가치는 연일 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물론 유가가 약세로 반전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제유가가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투기적 수요에 의해 과도하게 올랐기 때문에 정점을 통과하면 차익실현 매물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터키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면 과거 중동에서 일어났던 전쟁에서처럼 불확실성이 오히려 해소되면서 지정학적인 위험비용도 줄어들 것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현실화돼 가격조정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고유가 추세를 돌리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유가가 오르고 있는 원인들이 하나같이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대책들도 언제나처럼 원론적이고 장기적이다. 에너지 소비의 효율을 높이고 해외유전 개발에 나서야 하며 풍력이나 태양광과 같은 대체에너지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장 빠르게 고유가 충격을 국내에서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은 유류세를 내리는 것이다. 국내 휘발유 가격의 60% 가까이가 세금이다. 마진을 더한 원가보다 세금이 많으니 누가 봐도 기형적인 구조다. 정부는 세수확보를 위해 인하 여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한 해 국세세입의 20% 정도가 유류세로 충당된다고 하니 일견 그럴 만도 하지만, 올해 세수가 예산보다 11조원이 더 걷힐 예정이라고 하니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장기적인 대책만의 효과를 기다리는 동안 고유가로 골병드는 건 힘없는 서민들이다.

이지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