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속삭이는 ‘잔혹동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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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12면

한민우(강동원)는 스타덤에 오른 인기 작가이며, 부유하고 매력적인 은혜(공효진)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으며, 새롭게 시작한 소설은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고 있다.

이명세 감독의 미스터리 멜로 ‘M’

구토와 불면에 시달리던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다. 어느 날 마치 꿈을 꾸듯 이끌려 간 루팡 카페에서 미미(이연희)라는 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다음 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깨어난 그는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오랜 출장에서 돌아온 은혜는 민우의 이상한 변화와 알 수 없는 행동에 불안감을 느낀다.

동창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찾은 민우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마주치고, 미미가 자신이 잊고 있던 첫사랑의 소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를 다시 만나보기 위해 수소문해 보지만, 그녀의 행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그럴수록 민우는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서 혼란에 빠진다.

악몽으로 변한 동화
‘M’은 이명세 감독의 여덟 번째 영화다.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일리스트의 영화답게, 영화는 풍부하고 현란한 미장센과 편집 기교로 넘쳐난다. 영화에는 그동안 이명세 영화세계를 이루고 있던 많은 요소가 공존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결합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효과 또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명세의 영화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대부분 소녀 또는 소년이 꾸는 꿈이었다(물론 ‘지독한 사랑’이라는 예외는 있다). 그것은 첫사랑에 빠진 소녀가 꾸는 아름답고 순정한 동화로서의 꿈이거나,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며 하늘로 비상하기를 꿈꾸는 소년의 신화로서의 꿈이었다. 또는 그 동화와 신화의 만남이었다. 이명세의 영화세계는 인위적으로 창조된, ‘꿈보다 더 꿈같은’ 특별한 시공간이었다. 영화 ‘M’ 역시 그러한 꿈의 공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꿈은 더 이상 동화나 신화가 아니라 악몽이다.

자아를 반영하는 미스터리
‘M’은, 장르적으로 말하자면, ‘미스터리 멜로’다. 영화가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미스터리는 멜로를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영화 ‘M’에서 미스터리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나 한국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처럼, 멜로 효과를 높이기 위한 서사적 기교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영화 ‘M’은 ‘미스터리+멜로’인 셈이다. 이 영화에는 한 편의 미스터리 드라마와 또 다른 한 편의 멜로드라마, 이렇게 두 편의 영화가 각각 따로 존재한다. 그 멜로는 이명세의 영화세계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아왔던 매우 익숙한 세계이지만, 그 미스터리는 이제까지 그의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조금은 낯선 세계다. 그렇다면 그 미스터리 또는 악몽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창작의 고통’ 또는 ‘창작자로서의 자의식’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그 미스터리와 악몽의 세계는 지극히 자기반영적이다.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영화는 언제나 단순히 보아야 할(또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감상하고 체험해야 할 시청각적 구조물이었다. 특히 ‘M’은 체험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사운드는 관람의 공간을 체험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정밀하게 배치되고 편집되어 있다.

가령, 영화의 첫 대목에서 돈과 창작의 문제로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있는 민우에게 미미(정확하게는 그녀의 유령)는 “아프지 말아요”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관객인 우리의 뒤에서 들려온다. 그 순간 관람 공간은 곧 영화 속 공간이 되며, 관객인 우리는 영화 속 인물 민우와 같은 공간 안에 들어서게 된다. 즉 그의 히스테리를 함께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일식집 방 안에서의 ‘선풍기 바람에 의한 음성변조’에서도 두드러진 자기반영성이 나타나고 있다.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는 인물들의 목소리는 변조되어 들린다(흥미로운 것은, 그 변조 정도가 화면 안에 있는 인물과 선풍기 사이의 위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화면 밖에 있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서, 그러니까 마치 카메라가 선풍기 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조절되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 자신의 말처럼, 그 음성변조는 소설가 민우가 느끼고 있는 창작자로서의 압박감과 고통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그래도, 여전히 꿈을 꾸는 이명세
소설가가 주인공인 한, 어느 정도 창작자로서의 자기반영성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두드러지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민우는 대사와 몸짓(과장되게 양식화된 연기)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고, 영화는 정교한 편집을 통해 그 ‘안’으로 관객이 들어와 줄 것을 호소(또는 강요)하고 있다.

적어도 전반부 미스터리 또는 악몽의 세계는, 민우에게 찾아온 첫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미미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더 나아가 자신에게 첫사랑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창작의 고갈 상태에 빠진 그가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미미는 유령이라기보다는 민우의 욕망의 투사가 낳은 환상에 더 가까워 보였다. 민우가 고향에 내려가 미미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 미스터리 또는 악몽은 이제 ‘동화’가 된다. 아름답고 슬픈 사랑에 대한 동화 말이다.

‘M’의 ‘미스터리’와 ‘멜로’, 그 두 편의 영화는 각각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때론 유치해 보일지라도 이상하리만치 그 매력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두 편의 영화가 결합하는 방식은 다소 뜬금없어 보였고 납득하기 힘들었다. ‘M’은 참, 묘한 영화다.


마흔 살 늦바람에 영화평론 공모에 응모했다가 ‘영화평론가’가 됐다는 변성찬씨.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고 글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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