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을가다>1.강화군 末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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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광복 반세기-.해방 50년째로 접어들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허리가 잘려있다.전문가들은 지구상에서 재래식 화력이 가장 큰 규모로 집중 배치돼있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 휴전선이라고 입을 모은다.이 때문에 이곳 일대는 가보고 싶 어도 갈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8.15 49주년을 맞아 中央日報 특별취재팀이 육로 1백55마일.해로 1백55마일로 이어지는 휴전선 3백10마일의 한서린 민족분단의 현장을 가본다.
[편집자 註] 『한강하구.무등록선박 출입엄금.제1호』.
분단의 시작을 알리는 휴전선 시발점 표지판.3m 높이의 철봉에 매단 가로70㎝ 세로40㎝ 노랑바탕의 철판에 검정색으로 쓰인 16글자가 전부다.도톰한 언덕의 상수리.싸리나무와 노송사이숲속에 묻히다시피 초라하게 서있는 이 표지판 하나 가 7천만 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이 표지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과 한이 이 땅에 맺혀졌던가.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강화군서도면말도리.
서해의 맨끝 한 점인 末島는 외롭지만 그지없이 평화로웠다.해병 장병과 주민 12명이 인구의 전부.
주민들은 개펄에서 굴과 소라.꽃게를 채취하고 있었고 5㎞ 거리라는 바다건너의 북한 연백염전 마항동 마을이 어렴풋이 보였다. 말도에서 한반도 허리에 걸쳐 동해 영해상에 이르는 휴전선의길이는 3백10마일,4백96㎞,1천2백50리.철책은 육지 東端인 강원도 고성군 건봉령에서 경기도 파주군 오두산까지 연결되다끊겼다. 오두산에서 말도까지는 휴전협정상 지도에만 분단선이 그어져 있을뿐 눈앞에 펼쳐진 현장의 바다위에는 흔적도 없다.
말도는 남서쪽으로 3개의 평탄한 언덕이 뻗어있고 북동쪽으로는서너개의 야트막한 산봉우리가 있는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110고지가 솟아있다.고지를 중심으로 세 방향으로 난 비포장 도로는 각각 민가.선착장.표지판이 있는 해안으로 연결된다.
민가와 선착장 사이에 발달한 농토는 年1천2백가마의 쌀을 생산할 정도로 넓고 비옥하지만 주변의 언덕빼기와 야산 둘레엔 세월과 바닷물에 시달린 돌무더기가 가득 쌓여 얼핏 무인도처럼 보인다. 주민은 노장년 부부 6쌍 12명이 전부고 이중 47세가최연소자다.
통제구역이어서 고기잡이는 엄두도 못내고 개펄의 해산물 채취와농업으로 살아간다.사나흘에 한번씩 부정기적으로 다니는 행정선이육지와의 유일한 교통편.
인구감소.빈곤한 문화시설.경제활동의 둔화같은 현상은 말도를 포함한 휴전선 주변 마을의 공통된 특징.
또 조선시대 이래 전쟁전까지 물산이 풍부하고 중요한 교통요지였다는「화려한 과거」도 이들 지역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들이다.
이곳도 분단전 80여호가 살갑게 지내던 마을이 남북분단의 시발점이 되면서 썰렁해진 것이다.
언덕위에는 온돌.주춧돌등 당시의 집터 흔적이 아직도 띄엄띄엄남아있어 과거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곳을 지키는 해병들은 조수 간만의 차가 워낙 커 배의 운항에 애를 먹는다고 입을 모은다.
취재팀도 시간을 맞춘다고는 했으나 예상보다 빨리 들이닥친 썰물로 운항하던 경비정이 좌초하는 바람에 5시간동안 발이 묶여야했다. 이 때문에 어떤 문인은 서해의 조수를「세살바기 걸음걸이같이 어느새 왔다 잠깐 한눈 파는 사이에 저 멀리 내뺀다」고 표현했는가 보다.
잠시 7만병력이 동원된 인천상륙작전이 이곳에서 어떻게 성공할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많은 사람과 큰 무기를 실어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텐데 어떻게 당시의 海神은 이를 허용했을까.
안내한 해병장교는 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이 5천분의 1이었다고 설명한다.또 옆에 있던 병사는 만일 맥아더가 육군 출신이 아닌해군이나 해병 출신이었다면 엄두도 못냈을 작전이었다고 재미있게거들며 웃는다.
상황에 대한 無知가 때로는 용기와 결단을 내리게 하고 신의 도움으로 성공도 하면서 역사는 바뀐다는 얘기였다.
글 全榮基기자 사진 이지누(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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