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판타지 사극' 상상력에 역사를 버무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한국 고대사에 마법의 세계를 접목한 판타지 사극 ‘태왕사신기’. 덕분에 사극의 시청층이 10대까지 내려갔다.

“수지니야, 국내성으로 가 줄래?”

MBC 판타지 사극 ‘태왕사신기’에서 태자 담덕(배용준)의 대사다. 평민도 아닌 태자가 “가 다오”도 아닌 “가 줄래”란 현대어를 쓴다. 적에게 쫓기다 죽을 위기에 몰린 태자를 구하는 건 현무의 지팡이가 발휘한 ‘시간 정지’ 마법이다. 고증을 거쳐 역사 속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던 정통 사극이 현대극의 느낌과 뒤섞인 ‘퓨전 사극’을 거쳐 만화 같은 이야기를 그려내는 ‘판타지 사극’의 단계에까지 왔다. ‘태왕사신기’만큼은 아니지만 MBC ‘이산’이나 SBS ‘왕과 나’도 정통 사극의 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요즘 사극들은 역사에 상상력을 버무리는 게 아니라 상상력에 역사를 버무린다. 옛 고조선의 영토(쥬신제국)를 회복할 ‘쥬신의 왕’ 광개토대왕이 태어나면 잠들었던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의 신물도 깨어난다는 ‘태왕사신기’의 줄거리는 그야말로 만화 같다.

‘공중 부양’ ‘손가락으로 불 붙이기’ ‘적의 눈앞에서 사라지기’ 등의 마법도 수시로 등장한다. 이전엔 사료가 부족한 탓에 사극의 소재로 등장하기 힘들었던 고대사와 고구려사가 오히려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이야깃거리로 활용된 셈이다.

‘왕과 나’는 등장인물의 말투 등 형식은 정통사극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론 옛 틀에서 한참 벗어난다. 일단 주인공 김처선(오만석)에게 타임머신을 태워 성종과 한날한시에 태어나게 했다. 김처선을 실제 생몰연대보다 수십 년 뒤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산’에서 상상력이 가장 많이 발휘된 부분은 훗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가 될 송연(한지민)이 도화서 다모 출신이라는 설정. 여주인공의 비중이 높은 만큼 드라마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에피소드는 상상력으로 빚어냈다.

‘태왕사신기’의 여주인공 수지니는 어린 시절부터 술을 퍼마시고 도박장에서 노는 캐릭터로 나온다. 때론 태자 담덕보다 강하다고 느껴질 만큼 싸움을 잘하고 성질도 괄괄하다. 정적에 의해 축출 위기에 내몰리는 담덕과 왕을 끝까지 지켜주는 건 수지니(이지아), 신녀 기하(문소리), 부대장 각단(이다희) 등 여성들이다.

‘이산’의 화완옹주(성현아)는 아버지 영조(이순재) 앞에선 애교를 부리지만 뒤에선 권모술수를 써 정사를 쥐락펴락한다. 사내들과 음모를 논하는 자리에선 대장부처럼 술을 마시고, 배포 있게 내기 판에 돈을 건다.

반면 남성들은 연약해졌다. ‘태왕사신기’의 담덕은 살아남기 위해 기지와 힘을 숨긴다. 막상 실전에서도 적들이 쳐놓은 덫에 덜컥 걸려드는 등 완전무결한 영웅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곤궁에 빠졌을 때도 여성들의 도움, 혹은 마법의 힘으로 탈출한다.

‘왕과 나’의 성종(고주원)은 정사보다 사랑에 목을 매는 캐릭터로 나온다. 소화(구혜선)가 첫날밤 잠자리를 거부하자 “왕도 거부하게 만드는 정인이 누구냐?”며 질투심에 불타올라 시청자들로부터 ‘바람(둥이) 성종’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처선 역시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소화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제 손으로 거세하고 내시가 된다.

‘이산’의 주인공 이산(이서진)은 개중 가장 남성다운 캐릭터임에도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약한 모습도 서슴없이 드러낸다. 사극도 끊임없이 요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진화하는 셈이다.

이렇게 옛 사극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역사왜곡 논란의 도마에 오르는 등 부작용도 컸지만, 젊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본지가 시청률 조사기관 AGB닐슨미디어리서치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 정통사극인 KBS 1TV ‘대조영’은 본래 사극의 주 시청층인 남성 40대 이상에서 가장 높은 시청점유율을 나타냈다. 대조영 시청자 중 40대 이상 남성이 32%에 달했다.

그러나 ‘왕과 나’는 40대 이상 여성(37%)이, ‘이산’은 30~40대 여성(30%)이 주 시청층이었다. 판타지 사극이란 새 장르를 내세운 ‘태왕사신기’는 10대 청소년부터 30대 남녀까지 젊은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일반 드라마처럼 사극의 타깃도 점점 세분화하는 모양새다.

이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