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사회학>최영미 시집 "서른,잔치는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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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그 사회의 정신적 허기를 담아낸 인화지와 같다고들 한다.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서른…』가 30만의다양한 독자를 불러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의 시에서 찾기 어려운 차별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볼수 있을듯 싶다.
그 차별성의 하나는 정직하고 치열하다는 점이다.최영미는 서울에 살면서 서울을 저주하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문명을 증오하는 식의 상투적인「문학적 내숭」을 떨지 않는다.그는 들로 산으로 바다로,문학적 진정성의 전형 속으로 도망가지 않는다.서울의 한 카페에서 사랑하고(슬픈 카페의 노래),매연과 소음으로 혼탁한 서울 하늘 아래 집을 짓는 새들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며(새들은 아직도),만원 지하철을 타고 질퍽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고 싶어한다.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거기서 끝장을 보려 한다.
80년대 그가 젊음을 바쳤던 사회변혁운동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당장 자기에게 없는 전망을 그는 고통스럽게 찾아헤매는 시늉을 하지 않는다.대신 그는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80년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으로 범벅이 된 현재의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미 새로운 대상과의 싸움을 모색하고 있다.그 싸움은 모든 종류의 폭력과 지배에 대항하는 철학적 싸움,바로 휴머니즘이다.
『서른…』에서 자주 쓰이는 거침없는 성적표현도 남성중심주의라는 반휴머니즘에 대한 최영미식 싸움의 방식이다.그는 직접적인 메시지는 전달하고 있지 않지만「여자의 입으로 뱉어내는 거친 성적표현」자체가 가진 반사적인 의미로 남성중심주의를 위협한다.이같은 우회공격은 많은 여성들에게 반격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한번쯤 하고 싶었던,그러나 하지못했던 얘기를 가래침 뱉듯 통쾌하게뱉어낼 때의 청량감을 주었을 것도 같다.
『자위 끝의 허망한 한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너에게로 가는길을 나는 모른다),『어느 놈하고 였더라/시대를 핑계로 어둠을구실로/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슬픈 카페의 노래),『아아 컴-퓨-터와 X만 할 수 있다면』(Pe rsonal Computer).
이같은 직설적 성적표현에 대한 여성들의 열광이『서른…』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도화선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그러나 동시에최영미 시에 대한 오해를 낳는 화근이기도 하다.
최영미는『지금까지 도발적인 성적 표현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내가 격한 여성주의자인것처럼 오해돼온 점이 없지 않다』면서『성적 언술을 쓴것은 사물의 본질에 바로 가 닿기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는 대부분의 시에서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체험과 개인적인연애의 체험을 결합시킨다.그래서 직설적인 성적 표현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젊음을 묻은 80년대에 대한 절박한 감정의 은유이기도 하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은 자신이 몸을 바쳤던,그러나 자신을 지배하고 버리기도 한,80년대라는 애인에 대한 더러운 육정의 표현인 것이다.이 부분이 최영미 시의 가장큰 차별적 매력이다.
그는 혁명과 섹스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요소들을 결합시키면서 시적 통념에 일침을 가한다.24시간 편의점을 통해 외로움을 표현하고 퍼스널 컴퓨터의 자상함에 감동된 척하면서 『컴퓨터와 X만 할수 있다면』하고 기계문명을 조소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최영미의 시에서는 사랑이든,혁명이든,섹스든 어떤 시적 대상도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때문에 그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상투적이어서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것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어떤 때는 자신의 개인적 바람을 은근히 시속에 집어 넣어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시를 써서 밥을 먹으면/아니 그보다도 연애를 하면,시를 빙자해 괜찮은 남자 하나 추수할수 있다면/』(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이처럼 그가 독자와 대화하고자 하는 태도는 독자들이 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한다.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군림하는 시가 아니다.최영미는 『詩』라는 작품을 통해『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시』로 자신의 시적 지향과 문학관을 요약하고 있다.
최영미 시에 대한 독자들의 갈채는 행동으로 80년대와 살섞었던 그가 이제 시로 90년대와 섹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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