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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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44)팔베개를 하고 길남은 천장을 쳐다본다.옆방에서 누군가의 기침소리가 쿨럭거리며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어쩌다가 그 여자랑 그렇게 되었지.그녀를 안았던 손을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가만히 오무려 주먹을 쥐어 본다.
화순의 얼굴이 다가온다.
그녀의 그 부드럽던 몸이 손바닥에 뜨겁게 느껴진다.부피를 가늠 할 수 없이 두텁게 두텁게 그녀의 몸이 겹겹으로 가슴 위에쌓이는 것 같다.
한팔에 감기듯 가늘던 허리,몸을 떨리게 하던 젖가슴의 탄력,귓가에 와 뜨겁던 숨소리.그 모든 것이 살아서 뜨겁게 자신의 솜털 하나하나에 불을 지피는 것만 같다.
길남은 눈을 감는다.
마음이 이토록 편안할 수가 있다니.길남은 그런 스스로가 믿어지지가 않는다.
자리를 박차듯 일어난 길남은 어금니를 힘주어 물며 어둠 속에잠시 서 있었다.나도 데리고 가.그녀가 했던 말이 덜턱덜컥 돌덩이처럼 가슴에 떨어진다.
무엇을 털어내듯이 머리를 흔들며 길남은 밖으로 나왔다.밖으로나온 길남은 달빛도 없는 하늘을 쳐다보며 얼마를 서 있었다.숙사 앞 계단에 검정 자루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던 조씨가 불쑥 말을 걸었다.
『길냄이 아녀?』 무엇에 들킨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길남이 몸을 돌렸다.
『놀래긴 이 사람아.나여,조서방.』 『애 안 배기 다행입니다.인기척도 없이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자네 무슨 근심이라도있는 거여? 토옹 잠을 못자는 구먼 그려.』 『그냥…잠이 안 오네요.그나저나 아저씨는 왜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으세요?』 『나는 밤새 이가 아퍼서 한잠도 못 잤구먼.그저 이럴 때는 파를 솥뚜껑에 올려놓고 드글드글 굴려서 지져대면 되는데,원 여기가 무슨 집구석이라야 그걸 해보지.할미꽃 뿌리를 가지고 지져도잘 가라앉더라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 좀 나으셨어요?』 『겨우 좀 살만하네.
생각해 보면,꿩 잃고 매 잃은 셈이지.요즘 같아선 그냥 남방인지 뭔지 거기라도 가서 팍 죽어버릴 걸 그랬다 싶고…사람 마음에 모진 생각만 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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