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져 가던 신당 경선, 휴대폰 덕에 “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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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3시30분쯤 서울 충정로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후보 공보팀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검정 휴대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리자 방에 있던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휴대전화로 향했다. “야, 왔다” “빨리 받아” 하는 말이 앞다퉈 튀어나왔다. 전화기 주인인 송두영 팀장이 전화를 받은 뒤 “아니네”라고 하자 그제야 다들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송 팀장의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이런 장면은 반복됐다. 2차 모바일 투표가 실시된 이날 선거인단에 포함된 송 팀장이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이다. 신당 경선에 변수로 떠오른 휴대전화 선거가 빚어낸 풍경이다. 대통합민주신당 2차 모바일 투표가 실시된 11일 신당 사무처 직원들이 국회 대표실에서 휴대전화 투표 방법을 확인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정동영 후보 측 김영근 공보특보는 이날 아침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역시 모바일 선거인단에 들어간 그는 평소와 달리 버스에서도 휴대전화를 진동모드로 바꾸지 않고 벨소리를 최대로 올렸다. 오전 10시4분에 드디어 전화가 왔다. 온 신경을 집중해 4번(정 후보 기호)을 눌렀는데 흔들리는 버스 탓인지 다른 번호가 눌렸다. 김 특보는
“후보 기호가 없는 6번을 눌렀기에 망정이지 3번(손 후보)이나 5번(이해찬 후보)이었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안도했다.

모바일 선거로 신당이 들썩들썩한다. 투표소에 나가지 않고도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간편함이 주목받으면서 침체돼 있던 경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9일 실시된 첫 선거에서 투표율이 지역 경선의 세 배를 웃도는 70.6%로 나타나자 접수 마지막 날인 10일 하루에 5만3698명의 신청자가 몰렸다. 세 캠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전화를 붙들고 아는 사람들에게 참여를 호소했다. 이해찬 후보 측 허활석 종합상황본부 부본부장은 “인터넷 접수에 에러가 생겨 신청하려던 서너 명이 결국 참여를 못했다”며 억울해했다.

손 후보의 한 측근은 “하루 종일 전화해 77명을 가입시켰다”고 말했으며 정 후보 측 인사는 “말로만 신청하겠다고 할까봐 일일이 인증번호를 받아 적었다”고 밝혔다. 투표날엔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오거나 전화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캠프 지시가 전국에 전달되기도 했다.

2차 투표율이 74.9%로 더 올라가자 당 지도부는 한껏 고무됐다. 김효석 원내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6년 총선 때 ‘10년 후엔 안방에서 투표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현실로 나타났다”며 즐거워했다. 이낙연 대변인은 “우리 지역구에선 78세 노인도 거뜬히 해내더라”고 자랑했다.

모바일 투표의 결과는 경선에 흥미를 더했다. 초반 지역경선에서 독주하던 정 후보가 모바일에선 손 후보에게 1등을 내줬다. 지역 경선의 표차가 워낙 커 누적 득표에서 아직도 손 후보에게 1만 표 이상 앞서지만 ‘대세론’은 주춤하게 됐다.

휴대전화 선거만의 특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2차 투표 선거인단을 집계한 결과 남성(65.3%)이 여성(34.7%)보다 훨씬 많았다. 30대(31.3%)와 40대(27.2%)가 전체의 절반을 넘었으며 지역적으론 서울(27.2%)과 경기(19.9%)의 비율이 타 지역을 압도했다. 14일 실시하는 지역 경선 선거인단(서울 18.7%, 경기 14.0%)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휴대전화 소유자의 특성, 선거인단 등록에 필요한 인터넷 접근성 등이 반영된 현상으로 풀이된다.

모바일 투표는 서버에서 회선을 통해 선거인단에 전화를 걸어 실시한다. 한 회선으로 투표를 받는 인원은 시간당 40명 이상. 180개 회선으로 2시간 동안 2만5000명을 처리하기도 했다. 회선만 더 꽂으면 얼마든지 투표 인원을 늘릴 수 있다. 전화 통화료 이외에 추가되는 돈이 별로 없어 체육관에 유권자를 불러모으는 선거 방식보다 한결 비용이 저렴하다. 오전보다는 오후에 응답률이 높았고 출퇴근 무렵인 오전 9∼10시, 오후 5∼6시엔 낮았다.

우리나라 정당 경선에서 처음 실시된 사실을 감안하면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레 나온다. ‘박스떼기’로 얼룩진 지역 경선보다 잡음도 훨씬 적다는 게 중론이다.

물론 우려도 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민주주의 선거의 4대 원칙인 직접·비밀·보통·평등 선거에 모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대리·공개 투표가 가능하고 ▶휴대전화별 투표 기록이 서버에 남아 확인할 수 있고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배제된다는 문제 제기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런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A후보 측 인사는 “나는 지역 경선에 참여했기 때문에 집사람 휴대전화로 접수해 들고 다닌다”고 털어놨다. B후보 측 의원은 “친구가 회사 소유 휴대전화라 등록이 안 된다기에 부인 것으로 등록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한 사람이 두 표를 행사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 투표하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짐작케 한다. 회사 명의 전화를 쓰는 사람은 동참할 방법이 없다.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해 개통하는 ‘대포폰’이 선거에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중앙선관위가 지난 7월 신당의 모바일 선거 위탁관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다. 안효수 공보과장은 “대리·공개 투표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안 과장은 그러나 “정당의 경선은 당헌·당규에 따라 자체적으로 하면 되기 때문에 선거법으로 규제할 성격은 아니다”며 “모바일 투표도 그 자체가 위헌이라 보지는 않으며 대리·공개 투표 가능성을 방지하면 활용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2002∼2005년 영국과 스위스에서 지방선거에 휴대전화 투표를 도입하기도 했다.

엄주웅 신당 경선위 디지털분과위원장은 “선거인단 규모가 커지면 대리·공개 투표가 일부 일어나도 영향이 미미하다”며 “서버의 휴대전화 투표 기록은 나중에 완전히 파괴하게 돼 누구도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휴대전화 투표의 영향으로 신당 경선 결과는 더욱 예측이 어렵게 됐다. 14일 서울·인천·대구·경북·경기·대전·충남·전북에서 열리는 106만 선거인단의 ‘원샷 경선’과 1, 2차를 합친 것보다 많은 13만여 명 대상의 모바일 3차 투표(13∼14일)가 기다린다. 지금까지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정 후보의 승리가 예상된다. 막판 변화의 바람이 불 경우 손 후보에게 기회가 열린다. 경기도(23만여 명)보다 선거인단이 많이 등록한 전북(24만여 명)의 지역 경선 투표율과 수도권 표심이 관건이다. 응답자 한 사람이 10여 표의 파괴력이 있어 ‘경선 로또’라고도 불리는 여론조사(10% 반영) 역시 무시하지 못할 변수다. 이 세 가지 결과 모두 15일 오후 5시 20분쯤에 발표된다.

강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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