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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일이 즐거워진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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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31면

오랜만에 후배 웹디자이너가 나의 작업실 ‘비원’을 찾았다. 책상 밑에 놓아둔 쓰레기통을 보는 순간 대뜸 “어느 회사 제품이에요?”라고 물었다. 비로소 원하는 것을 발견한 듯한 표정은 진지했다. 얼마 전 사무실을 이전해 온갖 가구와 비품을 새로 사들였던 과정 때문이리라. 후배는 마음에 드는 물건 사기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에도 조화의 유기성을 따지는 안목 높은 디자이너의 선택이 쉬울 리 없다. 쓰레기통까지 챙기는 섬세함은 그녀의 전매특허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심플휴먼’의 ‘버터플라이’ 쓰레기통

디자이너의 작업실에서 쓰레기통은 사용 빈도가 높은 필수품이다. 쓰레기통은 쓰레기가 아니다. 쓰레기통은 지저분함을 감추는 중요한 소품으로 손색없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의 쾌적함과 편리가 쓰레기통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그녀의 지론은 수긍할 만했다.

열심히 발품을 팔았지만 결국 대형 마트에서 그렇고 그런 쓰레기통을 사들인 후배의 아쉬움은 컸다. 강한 포스가 느껴진다는 ‘비원’의 쓰레기통을 보며 그녀는 연방 볼멘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촘촘한 감성의 인간들은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생활소품을 만드는 회사가 바로 미국의 ‘심플휴먼’이다. 커피용구·부엌용품·목욕용품·쓰레기통 같은 물건들을 만들고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아무것이나 쓰지 못하는 선택형 인간들이 고객이다. 이 회사는 일상의 자잘한 용품에 미적 감각과 편리한 기능을 더한 세련된 제품들만 내놓고 있다.

삶의 이면은 모두 누추하다. 세련된 뉴요커나 아프리카 오지의 인간들 모두 먹고 싸고 돌아서면 흔적을 남기지 않던가. 사는 방식의 우위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속성상 지저분함이 남는 게 생활의 속내다. 이를 적당히 포장하고 디테일을 더해 편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를 선진이라 부른다. ‘심플휴먼’은 생활의 디테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다.

그 바탕은 바로 디자인이다. 열린 사고로 삶의 이면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개선된 무엇과 아름다운 개성을 파는 것이다. ‘버터플라이’ 쓰레기통을 처음 보았을 때 강한 포스를 느꼈음은 당연하다. 원형 혹은 사각이란 형태의 상식을 깨는 둥글고 각진 디자인. 페달을 밟으면 나비의 날개를 펼친 모습처럼 보이는 좌우 뚜껑의 신선함에 놀랐으니.

‘버터플라이’는 평소 쓰던 페달식 쓰레기통과 달랐다. 혹여 열리지 않을세라 힘껏 밟아대던 감촉의 배신이랄까. 내부엔 정교한 스프링 장치가 들어 있어 발의 힘은 부드럽게 나비의 날개로 전달된다. 닫히는 모습은 더욱 우아하다. 쓰레기 버리는 일마저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는 이런 쓰레기통도 있는 것이다. 평소 천대받던 발끝의 감촉까지 고려한 ‘버터플라이’는 바로 혁신의 모습이라 해도 좋다.

삶의 디테일은 오감충족의 구체적 방안을 찾는 일이다. 이를 흘려버리지 않는 생산자와 그 진가를 알아주는 사용자가 있어 감각은 진화한다. ‘심플휴먼’은 사용자보다 앞서가는 민감함을 지닌 얄미운 존재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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