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바둑 새 화두 “이세돌을 넘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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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이세돌 9단이 창하오 9단과의 대국 중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허공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 [사이버오로 제공]

하늘도 파란 가을날, 계룡산 자락에 자리잡은 유성 삼성화재 연수원에 다시 8명이 모였다. 유창혁 9단, 이세돌 9단, 박영훈 9단, 한상훈 초단 등 한국 4명과 창하오 9단, 구리 9단, 후야오위 8단, 황이중 6단 등 중국 4명. 조훈현·조치훈·서봉수가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이창호마저 탈락했다. 전설 같은 이름들이 얼굴도 생소한 신인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바둑계에서 다반사가 되었다. 일본은 32강전에서 일찌감치 전멸했다. 바둑을 진 뒤 쓸쓸하게 혼잣말을 하며 걸어가던 일본바둑의 계승자 조치훈 9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8강전 첫날인 9일, 유창혁 9단은 구리 9단과 맞붙고 박영훈 9단은 부담 주는 후배 한상훈 초단과 대결했다. 유창혁은 만 41세. 바둑 나이로는 이미 노장이건만 근래 그의 바둑은 전성기의 ‘일지매’가 되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기백이 충만했다. 기대가 컸다. 유창혁도 “목표는 우승”이라고 자신감을 토했다. 그러나 구리는 역시 중국 최강자였다. 눈에 띄는 패착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형세가 기울어 있었고 종반으로 갈수록 차이는 점점 더 벌어졌다. 구리, 흑 9집반 승.

이창호 9단을 격파하고 올라온 ‘초단돌풍’의 주역 한상훈 초단도 박영훈 9단과 만나 대마가 함몰당하며 무너졌다. 언제나 그렇듯 대회 초반엔 이변이 춤추듯 일어나다가도 준결승이나 결승에 이르면 낯선 얼굴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번에도 이변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한상훈은 바둑을 진 다음날까지 검토실을 떠나지 않는 집념을 보였다.

 둘째날인 10일, 한국의 상승장군 이세돌 9단과 전기 우승자 창하오 9단이 맞서고 다른 한판에선 같은 중국기사인 후야오위 8단과 황이중 6단이 만났다. 이세돌과 창하오의 대결은 그야말로 ‘결전’이었다. 창하오는 응씨배와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며 중국바둑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도요타덴소배 결승과 LG배 32강전에서 이세돌에게 연패하는 바람에 빛을 잃었다. 점차 이세돌은 중국바둑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누가 이창호를 꺾느냐로 10년 세월을 보낸 중국이 이세돌이란 새로운 강적으로 골머리를 싸매게 된 것이다.

창하오에겐 그래서 중국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부담이 된 것일까. 창하오는 초반에 너무 강하게 움직였다. 불리한 전투도 마다하지 않는 이세돌에게 이런 강경책은 고마웠을 것이다. 곧 생사를 건 백병전이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창하오는 자신의 진실한 능력인 폭넓은 대세관을 발휘해볼 기회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세돌, 흑 6집반승. 이세돌은 우승을 향한 첫번째 난관을 의외로 쉽게 넘었다.

 준결승전은 다음달 20~23일 3일간 유성에서 치러진다. 4강의 대진은 이세돌 대 황이중(그는 후야오위를 2집반 차로 이겨 생애 처음 세계무대 4강에 올랐다) 그리고 박영훈 대 구리의 대결로 치러진다. 이세돌은 조금 쉬운 상대를 만났다는 평이고 은근히 대진운이 괜찮았던 박영훈은 드디어 자신의 전 능력을 쏟아부어야 할 강적을 만났다.

유성=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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