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할말은하자>4.할말하다 매국노 됐던 개방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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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88년 4월초 무역협회 강당에서는 楊秀吉 당시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現교통개발연구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개방정책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楊위원의 발표가 끝나자 수십명의 농민들이 몰려 들어 욕설과 함께 분뇨를 퍼부었다.『농 업도 경쟁력이 약하니 主穀을 제외한 농산물 시장을 개방할 필요가 있다』는주장을 편 것이 봉변당한 이유였다.
87년 4월에는 朴雲緖 당시 상공부국장(現 상공자원부차관)이사무실에서 某處로 끌려갔다.공식 회의석상에서『對美 무역흑자가 커져 통상마찰을 불러일으키니 소비재인 양담배는 형식적으로 피우는 척이라도 해야 될게 아니냐』는 얘기를 한 때 문이었다.
위협적 분위기 속에서 반나절동안 조사받는등 곤욕을 치른 끝에가까스로 사건이 무마되긴 했지만 朴차관은 그때 자칫했으면 공무원 옷을 벗을뻔 했다.
「개방=惡」이란 등식이 일반화됐던 지난 80년대 우리 사회 분위기를 한 눈에 보여주는 몇가지 예다.
이들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주장들은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미국의 통상압력과 뒤이은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을 계기로 현실로 다가왔다.
우리는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압력에 대응하는「개방전략」을짜야했다.이제는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양담배가 팔리고 있다.
80년대 초반 개혁파로 불리던 金在益 당시 청와대경제수석과 姜慶植재무장관등은 개방론의 기수로 정부 안팎의 압도적인「反개방」세력을 상대로 힘겨운 씨름을 해야 했다.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과 상공부차관등을 지내면서 개방의 선봉에 섰 던 金基桓씨는『美 CIA의 앞잡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은 시장 경쟁원리에 충실하자는 것이요,대외적으로는밀려서 시장을 열기 전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준비하자는 것이었다.그래야 우리경제가 살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런 우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그러나 그때만해도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정신 나간 소리』였고 이런「개방 알레르기」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개방」에 관한한 논리나 합리성.
이해득실을 따져보는 치밀한 계산이나 치열한 토론 과정은 뒷전이다.나중에야 어찌됐든「국민 정서」를 이유로 개방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여론의 돌팔매를 맞았다.특히 농수산 분야는 워낙 민감한문제다 보니 누구도 드러내 놓고 얘기하려 들지 않았고,그 결과적절한 대응시기를 놓쳐 UR이후 훨씬 큰 부담을 지고있는 것이다. 지금은 공식화됐지만 불과 몇달 전까지만해도 아무도 쌀개방을 얘기하지 못했다.되레 대부분의 사람은「절대불가」를 외쳤고 정부도『절대로 열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렇다면이들이 쌀은 개방되자 않을 것으로 믿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私席에서는 개방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느누구도 드러내놓고는 말을 못하겠다고 하더군요.하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한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전한다. 그러면서도 욕먹을까 두려워 속과 다른 주장을 편것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이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않는다. 피해는 결국 농민,그리고 국민의 몫이 되고 만다.시류에 영합하는 무책임한 일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88년 4월 당시 楊위원장과 벌인 토론에서 개방불가를 주장했던 한 인사는 작년말 자신이 UR협상단의 일원이 되어 농산물 시장을 개방했고 귀국해서는 국민들에게 개방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는데 앞장섰다.
국제 사회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우리도 더이상우물안 개구리로만 남아 있을 수 없고 국제사회는 이를 용인하지않는다.세계 시장에서 우리가 다른 나라와 어깨를 겨루고 경쟁할수 있는 체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개방과 국제화가 뒷받침돼야 한다.지금까지의 사례가 교훈을 주고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국민정서와 정치적 고려에 발목이 잡혀 개방문제에 애해서는 흑백논리에 의한 인민재판과 마녀사냥 식의 비판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있다 시장을 여느냐 마느냐,얼마나 여느냐는 등의 결정은 다음 문제 다.당장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나라전체의 이익을 위해 나은편인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할 말은 할 수 있는 場이 마련돼야하는 것이다.

<金王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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