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떠세’ 부리지 말고 우리말 익혀보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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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매주 편집국에 도착하는 새 책들만 봐도 사회 흐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 무슨 영화가 개봉될 모양’이라거나 ‘20대까지 재테크에 관심들을 가지는구나’하는 식입니다. 편집기획자들의 노력 덕분인데 이번 주엔 한글날을 앞둬선지 한글 관련 책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그 중 『사랑한다 우리말』(장승욱 지음, 하늘연못)과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사전』(고정욱 지음, 자유로운 상상)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수필처럼 이어지는 설명이나 문학작품을 뒤져낸 예문들이 읽는 맛을 더하더군요.

 『사랑한다…』는 사라져가는 토박이말을 색다르게 꾸몄습니다. 신체, 사람과 직업, 의복 등 7개 분야로 나눠 205개의 표제어를 실었는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뜻풀이마다 관련어를 실어 모두 3100여 개의 어휘가 나옵니다.

 “…사시랑이는 가늘고 약한 사람이나 물건 또는 간사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어감이 비슷한 사그랑이는 다 삭아서 못 쓰게 된 사람이나 물건을 뜻하는 말이다. 소견 없이 방정맞고 경솔한 사람은 새줄랑이…’라는 ‘오그랑이(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가거나 주름이 잡힌 물건)’ 편처럼 정겨운 토박이말은 끝간 데 없이 이어지며 매혹적인 세계로 안내합니다.

 『다시 살려…』는 고쳐 낸 책입니다. 93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10년도 더 묵은 책인데 여전히 찾는 이가 있어 다시 냈겠지요. 곤충에서 해산물까지 43개 분야로 나눠 각 표제어를 사전식으로 풀이했는데 어르신들이라도 알쏭달쏭할 우리말이 수두룩합니다.

 ‘떠세’라고 들어봤는지요? ‘돈이나 세력을 믿고 젠 체하며 억지를 쓰는 일’이란 뜻으로 “이항복은 비록 정승까지 올랐지만 결코 떠세를 부리지 않았다.”처럼 쓰인답니다. 요런 말 미리 알았더라면 자식의 복수를 위해 손수 나선 어느 대기업 총수의 부정(父情)이나 혀를 차게 만드는 권력형 비리를 전하는 데 맞춤으로 써 먹었을 텐데 싶더군요. 아, 물론 그렇게 표현한다 해서 그런 행위가 정겹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언젠가 TV ‘국민드라마’에서 궁중에서 쓰인 품위 있는 말로 일본어에서 비롯된 ‘단도리’를 써 물의를 빚은 일도 있었죠. 아까운 우리말을 모은 이런 책들, 한글날 즈음해서라도 좀 널리 읽혔으면 싶습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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