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스님, 3·1운동때 태극기 처음 제안 불경 한글화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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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불교 경전은 모두 한문이었다. 재가 불자들은 기도만 하며 복을 빌 뿐,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길이 막막했다. 당시 불경은 철저히 승려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한문으로 된 불경을 처음 한글로 풀어쓴 이가 있다. 바로 용성 진종(龍城·1863~1940) 스님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매헌 윤봉길 의사를 만주로 보내고,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자고 제안한 이도 용성 진종 조사라고 한다. 그를 기리는 작업이 최근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선각자 용성스님=용성 스님이 펴낸 ‘한글 금강경’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조선 500년간 한문을 익힌 이는 주로 양반들이었다. 게다가 승려는 천민 계급에 속했다. ‘종놈’이란 말처럼 ‘중놈’이란 말이 퍼져 있던 때였다. 불교를 믿던 아녀자와 평민들은 한문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근대에도 불경은 여전히 어렵고, 먼 존재였다.

“용성 스님이 감옥에 계실 때 깜짝 놀라셨대요. 함께 수감됐던 목사님들이 한글 성경을 읽고 있었거든요. 불교가 들어온 지 약 1600년이 흘렀는데 불경은 한글본이 없음에 가슴을 친 거죠.”

용성 스님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최근 세워진 죽림정사의 주지 법륜(法輪·54) 스님의 말이다. 그때만 해도 귀중한 부처님 말씀을 ‘천한’ 한글로 번역해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비난도 거셌다고 한다.

용성 스님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사람이다. 법륜 스님은 “3·1운동 때도 만해 한용운 스님은 흰 바탕에 청색의 한반도를 그린 깃발을 들자고 했대요. 그런데 용성 스님이 ‘그럼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인 만주를 포기하게 된다’며 태극기를 들자고 했다더군요.” 법륜 스님은 이 얘길 용성 스님의 손상좌인 은사 스님(불심 도문 스님)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용성 스님은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독립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광복을 5년 앞두고 입적하고 말았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은 12월12일, 용성 스님이 창건한 서울 종로의 대각사를 찾았다. 그는 스님의 영정 앞에서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자금을 계속 보내주시어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주시어 만대 귀국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 주셨나이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스님의 뜻을 기리며=독립운동으로 인해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용성 스님은 늘 일제의 감시하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를 떠난 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스님은 서울 종로의 대각사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법륜 스님은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용성 스님의 생가 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밭이었다”며 “마을 이름을 딴 죽림정사를 이곳에 세우고 스님의 생가도 복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기에도 독립 운동과 정법 수행을 병행한 용성 큰스님의 삶과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덧붙였다.

죽림정사는 8일 ‘용성 진종 조사의 사상과 한국불교의 좌표’란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갖는다. 또 9일에는 죽림정사 낙성식을 갖고 회향법회 및 용성 음악제를 연다. 02-587-8994, 063-353-0108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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