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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81.권력이동과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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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흔히「절대권력은 나눠가질 수 없다」는 권력속성을 비유해「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자연계와 달리 정치권력 세계에서는 일시적으로 태양이 2개인 때가 불가피하다.지는 태양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태양이 떠오르는 시기,다시말해 대통령선거 이후부터 새로운 대통령당선자의 취임 이전까지가 바로 그런 자연스럽지 못한 시기다.
물론 그 기간중에도 명목상 유일 태양은 현직 대통령이다.하지만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세계도 夕陽의 落照보다 昇天하는 旭日의 기세가 등등한 것이다.그리고 두 태양의 양립은 곧 권력갈등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대통령당선자라는「떠오르는 태양」의 존재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87년 12월17일부터 88년 2월25일까지다.그 이전,즉 李承晩.朴正熙대통령시절은 대통령 자신이 곧 당선자인 連任의 시대였기에 당선자라는 말이 필요없었 으며,全斗煥대통령은「군부의 실세」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기에「당선자」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했다.
전례없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 시기는 권력을 놓는 사람에게나 권력을 새로 잡는 사람에게나 생소했다.「지는 태양」과「떠오르는 태양」의 갈등은 전례가 없었기에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갈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줄 아는 경험도 없었거니와 갈등 충돌을 완화해줄 제도적 장치도 전혀 없었다.
갈등이 권력세계의 내부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히 새로운 태양의 탄생,곧 盧泰愚후보가 대통령당선자로 확정된 시점부터라고 할수 있다.투표가 끝난 87년 12월16일 밤 개표가 시작되면서 처음부터 盧후보는 1위로 나섰다.자정을 넘기면서 당선이 확실시됐으며,다음날 오전10시 盧후보는 당선을 확신하고 당사에 나와 기자회견을 했다.
全斗煥대통령쪽에서 처음으로 盧泰愚당선자를 만나러 간 사람은 安賢泰경호실장이었다.당선자의 경호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담당하는법에 따라 경호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17일 오전11시 당사에 도착했다.
安실장이 당사에 나타난 시점은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해 법적으로 당선자가 확정된 시점,다시말해「개표중 1위 후보와 2위후보간의 득표차가 개표가 안된 표의 숫자를 넘는 시점」이었다.
安실장은『당선을 축하드립니다.이시간부터는 법에 따라 저의 경호팀에서 경호를 담당하겠습니다』라고 말한뒤 함께 온 청와대 경호팀과 기존의 후보경호팀간 인수인계를 지휘했다.바로 이때 安실장은『몹시 섭섭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盧당선자의 측근들이 大選승리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이번 선거는 民正黨이나 全斗煥대통령이 이긴게 아니라 盧泰愚후보 개인이이긴 것』이라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펼친 것이다.물론 이에 앞서선거기간중 포스터나 플래카드에 民正黨 이름을 쓰지 않은데 대해全대통령이 질책하자 당에서『民正黨이 인기가 없어 안썼다』고 얘기할 때부터도 섭섭한 점은 있었다.
하지만 이날의 분위기는 全대통령을 드러내놓고 깎아내리지 못하던 이전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랐다.安실장이 듣기에 全대통령의 노력을 폄하하는 노골적인 언사가 당연한듯 오갔기에 몹시 불쾌하지않을수 없었다.
같은 얘기가 全대통령 귀에 직접 전달된 것은 다음날 밤이었다.18일 밤 全대통령내외는 축하차 盧당선자의 집을 방문했다.
全대통령과 盧당선자간에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덕담이 오갔다.
그러나 문제는 두사람의 부인들이 내실에서 따로 얘기를 나누던중에 일어났다.
盧당선자의 부인 金玉淑여사가 李順子여사에게 선거과정의 어려움을 얘기하던중『民正黨이 인기가 없어서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라고「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5共측 관계자 Q씨는『盧후보 내외가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전까지는 全대통령내외 귀에 들릴까봐 함부로 입밖에 꺼내지 못했지요.그런데 당선되자마자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李여사는 청와대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全대통령에게 이 얘기를 했다더군요.나중에 李여사는 그 얘기를 들은 당시의 심경에 대해「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하더군요.친구라기보다 부하라고 생각될 정도의 인간관계를 유지해오던 두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할만 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라고 기억했다.
말을 아끼는 盧당선자를 대신한 부인 金여사가 며칠뒤 더욱 노골적인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12월20일께 당선을 축하하기위해 육사 11기 동기생들이 부부동반으로 盧당선자의 집에 모였다.全대통령내외는 물론 5共의 실세였던 權翊鉉의원과 6共의 창업공신인 鄭鎬溶국방장관등 7~8쌍이 모여 얘기를 나누던중 金여사가 나서『우리는 국민이 직접 투표로 뽑아준 대통령이어서 체육관 대통령하고는 달라요』라면서 예의『民正黨이 인기없어…』라는 주장을 털어놓았다.이런 金여사의말을 이자리에서 처음 들은 權의원은『벌써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기억했다.權의원은 당시 자리를 파하면서 몇몇 사람에게『앞으로 뭔가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겠다』라는 귓속말을 남겼다. 全대통령의 육성은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 그의 심경은 5共의 핵심이었던 權의원과 비슷했으리라 추측된다.
全대통령의 심경은 퇴임 직전 부인 李여사가 퇴임후 여행구상에들떠있는 것을 보고『벌판에 홀로 서게 되니까 그런 꿈은 버려라』고 말했다는 全대통령의 아들 宰國씨 기억에서도 확인된다.
이같은 섭섭한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한 것은 기본적으로 대선 勝因에 대한 평가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金여사가 대변한 6共측 평가는 한마디로「후보 개인의 인기」와「사조직의 노력」덕분으로 요약된다.후보의 인기는 당연히 盧후보 자신의 몫이며,사조직은 朴哲彦특보의 몫이라 할 수 있다.반면 全대통령과 民正黨은 인기가 없어 오히려 선 거과정에 걸림돌이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6共측에서도 全대통령의 선거자금 지원과 공권력 동원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기여를 인정한다.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기여를『권력의 생리상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6共 관계자 X씨는『全대통령이 盧후보 당선을 위해 노력한 것은 인정하죠.그러나 이를 냉정하게 보면 퇴임후 자신의 안위를 고려한 행위예요.만약 당시 全대통령이 나몰라라 하고 팔짱만 끼고 있다가 盧후보가 낙선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 습니까.아마全대통령이 지금처럼 연희동 집에서 살고 있지 못했을 겁니다.그나마 盧후보가 당선됐기에 백담사에 갔다 오는 걸로 끝났지요』라고 주장했다.
全.盧 두사람을 모두 잘 아는 Q씨 역시 이같은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그는『全대통령이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盧泰愚라는 사람을 후계로 결정한 것은 퇴임후 자신의 뜻을 가장 잘따라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두 사람이 가장 친했던 것은 盧대통령이 워낙 성격이 물러서 성격이 강한 全대통령과 전혀 갈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런 성격을 가장 잘 아는 全대통령이니까 퇴임후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 盧대통령을 후계로 선택한 것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그러나 그런 생각은 全대통령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죠.권력의 속성이 그런게 아니었으니까요.全대통령은 퇴임후 자신의생각과 전혀 다르게 일이 벌어지자 비로소「나는 가장 정치를 모르고 정치를 했다」고 한탄했죠.그게 맞는 말이에 요.사실 全대통령은 정치를 한게 아니거든요.절대권력을 가지고 통치하고 군림했을 뿐이죠.全대통령은 쉽게 권력을 잡았기에 권력을 놓는다는 일도 쉽게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당시 5共측의 大選 勝因에 대한 평가는 盧당선자측과 판이하다.한마디로 盧泰愚대통령은 全대통령,즉 5共이 만들어줬다는 주장이다.이는 全대통령 자신의 언급에서도 확인된다.全대통령은 88년1월12일 퇴임을 한달여 앞둔 시점에서 鄭周永현대그룹회장등 日海재단 이사인 재계 거물들과 만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내가 盧총재한테 정권을 주었지만 전부 내 말대로 합니까.鄭회장이 자식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면 나중에 밥값도 안줍니다.대권이라는게 누구에게 주었다고 내말 듣고 고분고분 하겠어요….』全대통령은「盧총재에게 정권을 주었다」고 표현했다.나아가 자신이가지고 있던 대권을 盧대통령에게 넘겨준 행위를 사기업 회장이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상속행위에 비유했다.절대권력인 대권은자신의 사유재산과 같기에 자신의 마음대로 양 도할 수 있으며,대권을 양도받게 된 후임 盧대통령은 마치 오너회장인 자신의 아들과 같은 후계자로 보았던 것이다.
***서로 “내덕에 당선” 全대통령 입장에서는 적절한 비유일것이다.자신이 12.12를 통해 직접 대권을 창출했으니 대한민국,적어도 5공화국이라는 회사의 오너이자 창립자라 믿고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87년 大選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자금을 직접 모금해 盧후보에게 주고 공권력을 총동원해 지원해준 것도 자신이기에 재창출된 대권 역시 자신의 소유나 마찬가지라 생각할 수 있다.全대통령은 선거과정에서도『뭐든 힘으로 밀어붙여야 이긴다』고 생각하고 선거전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全대통령이 보기에 자신의 권력을 물려받는 盧泰愚라는친구는 아버지로부터 기업을 물려받는 재벌2세와 같은 존재라해도어색할 것이 없었다.
全대통령은 자신이 재창출해 넘겨주는 정권,다시말해 6공화국은5共의 연장이라 생각했기에 자신의 이임식과 盧대통령의 취임식을함께 하고자 했다.그는 또 퇴임후 대기업 창립자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남듯 자신도 국가원로자 문회의 의장으로남아 대권 2세인 盧대통령을 뒤에서 후견하고 자문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대권을 잡게된 盧당선자쪽에서는 이런 全대통령의 감정과 의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대권을 全대통령의 상속이나 양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全대통령.5共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면서 어렵게 쟁취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는 당연했다 .
6共 핵심들의 全대통령에 대한 속마음은『깨끗이 물러가라』는 요구였다.당시 분위기에서 내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落照는 밝지도 길지도 않았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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