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과 광고모델(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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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립대학 약학대 학장이 소화제를 선전하는 TV광고에 나왔다면 이는 정말 큰 일이다.누구라면 다 아는 수학자가 수학 참고서를 선전하는 책광고에 출연했다면 이 또한 꼴불견이다.왜 큰일이고 왜 꼴불견인가.공적인 지위로 얻어진 신뢰성을 사적으로 이용하는데서 생겨나는 상품선전의 과장 효과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강제규정으로 명문화해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게 방송위원회의 의지다.방송위는 최근 국회의원과 국공립대학 교수의 광고출연을 금지하는 심의규정을 새롭게 명문화했다.
일견 합당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다.정치 지망생들이 너나 가리지 않고 광고에 출연해 얼굴이나 팔려는 정치 선전장으로 빠질 공산도 있고 상품의 질에 대한 올바른 선택을 과대 광고로 흐리게할 소지도 있다.
그러나 문민시대인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이런 강제규정을 시시콜콜 신설하면서까지 모델의 출연 제한조항을 둬야하는지 의문이다.더구나 애당초 연예인으로 정치인이 된 사람에게까지 이 조항이 적용될 경우 남의 생업까지 위협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도 TV드라마에는 이순재의원이 『야망』이라는 연속극과 정수기 광고에 출연중이고, 최영한의원은 『전원일기』와 홍삼원 광고에,강부자의원은『남자는 외로워』와 농심 광고에 출연중이다.연극인과 탤런트로서 평생의 업을 삼아 살아온 이들에게 TV출연을 막는다는 것은 생업을 포기하라는 압력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실정법 위반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국회의원의 겸업을 현행법은 허용하고 있다.방송위 심의규정으로 법률의 취지를 무시하겠다는 뜻인가.멜리나 메르쿠리와 로널드 레이건이 가수고 배우였다지만 이들이 공직에 있을때 결코 노래를 부르거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그것은 법 규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상식의 판단에 따랐을 뿐일게다.
우리의 국회법에도 국회의원의 품위에 관한 규정이 있고 품위를 손상시켰을 경우 응분의 제재를 받게끔 되어있긴 하다.그러나 코미디언 출신의 국회의원이 코미디에 출연했다 해서 품위를 손상시키고 영원한 TV탤런트가 연속극과 광고에 출연했 다 해서 국회의원의 공직성을 남용했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규제 만능의 옹졸한 행정규제는 권위주의 시대에나 통용된다.진정한 문민시대란 법과 규제 이전에 자율과 상식이 통하는 시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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