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백일장9월] “세상이 감기 앓듯 아파 보였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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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은 넘겼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이었다. 장원 당선을 알리는 수화기 너머로 군기가 바짝 든, 그러나 발갛게 상기된 목소리가 건너왔다.

 “얼마 전 감기에 걸려 며칠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집이 아닌 내무반에서 몸이 아프니 왠지 모르게 슬프더군요. 그때 문득 바라본 창 밖 세상도 마치 환절기 감기를 앓는 것처럼 아파보였어요. 묘했죠. 그 순간의 느낌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중앙 시조백일장 9월 장원 정상혁(21·사진)씨는 지난 5월 입대한 의무소방대원 이방(육군으로 치면 이등병)이다. 정씨는 집 떠나 처음 앓아본 서글픔을 여름과 가을, 계절 사이에 스미는 노을의 이미지로 녹여냈다.

장원작 ‘환절기’는 젊다. 흔하디 흔한 일상의 느낌을 그림 그리듯 선명하고 신선한 이미지로 그려냈다. 심사위원들도 계절의 틈새를 짚어낸 그의 참신한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첫 수와 셋째 수의 매끈한 이음매에선 나이답지 않은 원숙함이 느껴진다.

 정씨가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 실린 시조 작품을 읽고 매료돼 자연스레 창작에 나섰다. “혼자 시조집을 사서 읽고 기본 율격에 맞춰 흉내를 내는 정도”라고 몸을 낮추지만 그는 고3때인 2004년과 지난해 두번에 걸쳐 중앙 시조백일장 차하를 수상했다. 세 번째 응모에서 장원이 된 것이다.

 “오래 두고 고쳐 쓴 작품은 누더기 같아서 글감이 포착되는 순간 쓴다”는 그는 군생활 중에도 시조를 내려놓지 않았다. 키보드 대신 연필을 쥐고 틈틈이 생각을 정리해왔다고 한다.

시조가 좋아 대학 전공도 국문학으로 선택했다는 정씨에게 시조의 매력이 뭐냐고 물었다. “중언부언 없이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운율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시조가 음악에 가장 가까운 문학 장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젊은 세대에겐 격조한 장르가 아니냐고 다시 질문하자 “보통 낡고 고루하다고 여기지만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만 뒷받침된다면 짧은 글로 폭발적인 감동을 얻어낼 수 있다”며 시조예찬론을 폈다. 따지듯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젊은 시조시인의 탄생을 예감한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창피하다며 사진 찍기를 한사코 꺼리던 수줍은 문학청년은 앞으로의 희망을 묻자 사뭇 눈초리가 또렷해진다.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소리를 내는 악기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사진=이에스더 기자

계절과 계절의 틈새
짚어내는 감각 참신

심사위원 한 마디

시조 형식에 능숙해진 응모자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눈에 띄는 형식 만큼 내용은 그에 못 미치는 작품이 적지 않다. 형식에 치중하다 내용엔 노력이 덜 갔는지 모르지만, 내용이 있어야 형식이 아름답다.

 장원에 정상혁 씨를 올린다. 정상혁 씨는 이미지 직조 능력이 뛰어나다. ‘환절기’라는 계절의 틈새를 짚어내는 감각이나 언어도 참신하고 명징하다. 특히 ‘지구의 먼발치부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는 첫 수의 이미지를 ‘노을이 지는 것이다, 여기저기 아프다고’로 완결한 것은 탁월한 구성이다. 형식이 다소 불안해 보이는 것은 음보를 다지지 않는 이미지 위주의 습작에 기인한다. 셋째 수의 어색한 구절 ‘세상의 끝에서부터’ 는 조정이 필요하지만, 행간 걸침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율격을 조금만 고려하면 정상혁 씨는 좋은 정형시를 쓸것이라 기대된다.

 차상의 배명민 씨는 형식 운용이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이미지의 유기적 구성도 돋보인다. ‘파도’를 ‘꽃’으로 은유하며 이미지를 고르게 배치하고 마무리하는 데서 그간의 습작이 짐작된다. 별 흠이 없는 듯 보이는 작품이 차상으로 밀린 것은 참신성이나 이미지의 다양한 결이 장원작에 달리기 때문이다. ‘꽃잎이 피어오르듯 음표들이 피어난다’ 같은 신선한 표현에 못 미치는 몇몇 구절이 작품의 밀도에 손상을 입혔다고 하겠다.

 차하의 송유나 씨는 잘 빚은 소품을 보여준다. 욕심 부리지 않고 시상을 형식 안에 잘 다듬어 앉힌 것이다. 그런데 단아하고 야물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친 듯한 공소함이 작품의 함량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는 대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새롭게 그려가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심사위원 : 김영재·정수자>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매달 장원·차상·차하에 뽑힌 분을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장원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등단자격 부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함께 『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응모시 연락처를 꼭 적어주십시오.

■접수처=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100-759)

▒바로잡습니다▒

차상 당선작 셋째 수의 초장 '땅끝 바다, 한 여자가 느닷없이 들어와서'가 제작상 실수로 빠졌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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