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에서 파워워킹까지, 한국 걷기운동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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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걷기운동의 시작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초 당시 일본의 걷기협회 ‘일본걷자걷자협회(현재 일본워킹협회)’가 “가자 동방의 나라로 그리고 걷자 걷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한국 땅을 밟았다. 부산을 시작으로 경주 등 한국의 고도를 걸으며 문화유적을 돌아보는 행사였다.
일본 걷기 단체가 한국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당시 일본에 번진 열풍 때문이었다. 이미 일본은 1970년대부터 ‘아루케 아루케(걷자 걷자)’라는 캠페인을 시작으로 걷기운동이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만보족(萬步族)’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걷자걷자협회를 맞은 사람은 현재 범태평양 걷기운동 LA본부 회장과 재미대한걷기연맹 회장을 맞고 있는 김대복(81) 옹이다. 김옹은 나중에 일본워킹협회 초대회장을 맡았던 가네코씨와 현재 일본워킹협회 총무를 맡고 있는 미찌노부씨 등 일본인 100여 명과 동행하면서 일본의 걷기열풍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한국 걷기운동의 창시자 김대복 옹
이러한 경험은 한국에도 걷기운동을 보급해야겠다고 결심으로 이어졌고, 김옹은 행사가 끝난 후 관련 정부기관과 시민사회단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건강이고 뭐고 한시라도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걷기’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소리였다.
걷기에 대해 사람들이 그나마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88올림픽 이후였다.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생활체육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고, 1989년 7월 한국걷기본부(회장 한글학자 한갑수)가 창설됐다. 또 1990년대 들어 한국체육진흥회를 중심으로 트레킹 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국내에서 공식 국제걷기대회가 열린 건 1995년이었다. 스포츠재활을 통해 걷기의 효능을 경험한 체육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1994년 한국국제걷기대회조직위원회가 발족됐고 다음해 10월 21에서 22일까지 경주에서 제1회 한국국제걷기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경주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우선 한국의 고유한 문화유적지를 외국인에게 소개하기에 경주만 한 곳이 없었다. 또 국제걷기대회를 발전하기 위해서는 숙박시설이 따라주어야 했는데 경주는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인 50여 명을 비롯해 300여명이 참가한 대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명색이 국제대회였지만 국내 참가자는 기대했던 수에 턱없이 모자랐고 국민적인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걷기 운동의 두 축, 대한걷기연맹과 한국워킹협회
결국 걷기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강옥 교수가 원주 상지대 체육대학으로 오면서 원주가 새로운 걷기의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96년 제2회 한국국제걷기대회가 원주에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상지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이 주축이 됐고 원주시 역시 반신반의하면서도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1996년과 1997년 2년 동안 국제걷기연맹(IML)의 실사를 받고 1998년 국제걷기대회로 인증 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인 걷기대회가 열리자 걷기에 대한 관심도 급속도로 확산돼 나갔다. 2001년 6월 성기홍 의학박사를 중심으로 사회지도층인사가 주축이 된 한국워킹협회가 출범했다. 걷기운동의 생활화 및 올바른 걷기문화 정착, 민간차원에서 건강 걷기운동 실천 모임 운동 등이 목적이었다.
걷기운동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대한걷기연맹과 한국워킹협회를 중심으로 걷기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홍보가 이루어짐으로써 일간지와 여성지 등 대중매체에서 걷기의 건강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003년 KBS 1TV <생로병사의 비밀>에 ‘마사이족처럼 걸어라’편이 방송되면서 ‘생활이 아닌 운동’으로서의 걷기에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동섭 프리랜서 kadmon@naver.com
도움말_ 이강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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