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벼라 세상아, 나는 루키다

중앙일보

입력

청년 실업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른다는 요즘,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 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기업에 입사한 사회초년병들. 허나 사회가 어디 그리 만만한 곳인가. 연수기간 동안 새내기들의 행군은 첩첩산중, 베갯머리는 눈물 반 땀 반이었을 것이다.

지난 8월 22일 신입행원 연수를 마친 기업은행 신입사원들은 ‘새내기 첫걸음 행사’로 오전 10시 기업은행 기흥 연수원을 출발해서 하루 동안 강남운전면허장, 잠수교, 남산, 명동, 광화문, 청계천을 지나 서울 을지로 본점까지 약 40km을 행군했다. 그 대장정에 참여했던 두 사람의 짧은 연수일기를 소개한다.

"기은창조 190명은 전원 무사도착을 신고합니다.” 강연옥(기업은행 남대문지점 근무)

7주간의 연수가 끝나간다. 은행의 주요업무교육과 은행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교육을 끝내고 한라산 등반, 아이디어 콘테스트 등 갚진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신입사원 연수의 하이라이트라는 ‘새내기 첫걸음 행사’. 재작년에는 야간 산악행군이었다고 하던데, 올해는 도심지를 걷는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아차! 190명을 대표하는 반장으로 활동했던 나는 그 동안의 부담감과 무리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새내기 첫걸음 행사 당일에 덜컥 병이 나 버렸다. 평소에 이렇게 걸어본 적도 없고 따로 운동을 했던 적도 없었던 나는 몸 상태가 악화되어 급기야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몸을 이끌고 먼 길을 걷는다는 건 이미 무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기들에게 부담이 되기 싫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동기들의 몸 상태도 다들 좋지 않았다. 나와 같은 조였던 중국인 신입사원 방각은 낯선 환경에 무리한 탓인지 결국 쓰러져 버리고. 포기해야 하나, 절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때 한 동기가 말했다. “반장, 쓰러지면 내가 업고 갈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새내기 첫걸음 같이 해요.”
그래,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어. 걷고 또 걷고 계속 걷다보면 목적지에 도달하겠지. 고작 10시간.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하지만 막상 시작하면서, 내 몸도 몸이었지만 나의 욕심 때문에 동기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뒤쳐질까봐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고, 자신의 마실 물을 양보하고, 주저앉으면 업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행군도중 비는 또 어찌나 많이 오던지. 그래도 추적추적 비를 맞으면서 걷다가 먹었던 라면과 우동국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행군 내내 지치지 않고 목청껏 불러댔던 노래, 발에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나도 빗물이라고 우겨대던 동기들의 함성도 잊을 수 없다. 그래, 가 보자.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또 끌어주기도 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믿는 마음일 테야.
동기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세심한 배려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은행 문을 열고 힘차게 소리쳤다. “기은창조 190명은 전원 무사도착을 신고합니다.”
나는 지금 남대문 지점에 근무하고 있다.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영상이 지금도 또렷하다. 따가운 햇살 아래 내 의지와는 다르게 발이 풀릴 때마다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던 동기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스스로를 다그치며 다시 우뚝 섰던 내 다리.
40km 행군. 그것은 내게 단순한 발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를 지탱할 하나의 주문이다. “나는 루키다. 나는 다 할 수 있다. 내게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루키다. 나는 최고다.” 이승윤(반월중앙지점 근무)

7월 9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190명의 동기와 함께 7주간의 신입행원 연수가 시작됐다. ‘잘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감이 컸지만 팀워크 훈련, 직무연수 등의 시간을 보내면서 내 곁에 나와 함께 하는 190명의 동기가 있다는 생각에 든든해졌다. 그리고 이 생각은 연수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새내기 첫 걸음’ 행사를 겪으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가벼운 스트레칭과 힘찬 구호가 끝난 후, 약 10시간 동안 진행될 행군의 첫 걸음이 시작됐다. 190명의 동기들은 각각 15개조로 나뉘어서 구호와 조가를 부르며 호기 있게 출발했다. 그러나 약 4시간 쯤 걸었을 때부터 많은 동기들이 처음의 패기와 열정보다도 몰려오는 피로감과 갑작스런 소나기로 서서히 지쳐갔다. 몇몇 동기들은 너무 힘들어 주저앉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배낭을 대신 들어주며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우리의 1차 목적지인 남산에 이르렀다.

이태원을 지나서 남산으로 오르는 코스는 참 힘겨웠다. 겨우 남산에 올랐을 때 우리를 맞이해 준 건 놀랍게도 선배들이었다. 꼭두새벽부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내기의 첫 출발을 축하해주기 위해 선배들이 직접 따뜻한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다. 많이 지쳤지만 다시 일어날 힘이 생겼다.
재충전을 한 우리는 명동 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고, 명동에 들어가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회사 홍보를 위해서 길거리 마케팅에 나섰다. 땀에 범벅이 된 초라한 행색도, 난생 처음 해본 길거리 홍보도 부끄럽지 않았다. 40km 행군을 우린 해낸 것이다. 우리에겐 그 자부심과 열정만이 가득했다.
요즘 새로 맡은 업무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연수과정을 생각하면 “이쯤이야”라는 생각에 저절로 힘이 솟는다. “나는 루키다. 나는 최고다.”

장치선 객원기자 chrity19@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