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에로 비디오 국제 비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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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갔을 때 아키아바라에 들렀다. 전자제품으로 유명한 그곳의 한 건물에 들어서자 층마다 각양각색의 포르노와 에로 영화가 가득했다. 장르 또한 다양했고 인디펜던트 에로 작가들의 피땀 어린 작품들을 대할 땐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성적 심미안을 최대한 충족시켜 줄 '작품'을 발견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국 출장 갔을 때 업무를 마치고 서너 군데의 대형 DVD 매장을 들렀다. 모두 포르노 전문 매장이 있었고, 수많은 영화가 촘촘히 꽂혀 있었다.

굳이 일본과 미국의 예를 들며 시작한 건 그들은 에로틱 콘텐츠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한국의 에로 비디오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바라볼 때 좀더 다양하고 근본적인 이야기가 가능하다.

1988년을 원년으로 본다면 한국 에로 비디오의 역사도 이제 16년의 연륜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그 영화들이 아직까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이유는 꼭 작품성 때문이 아니다. 한국은 아직까지도 비디오 대여점과 인터넷 상영관(혹은 여관방 채널)을 통해 소비되는 그 영화들을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에게 에로 비디오는 저급한 성인 문화며, 비디오 산업의 음지며, 제목 패러디의 달인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각종 불법 사이트에 범람하는 '쎈' 동영상들과 비교할 땐 '저강도'라는 수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에로 산업을 어중간한 그 무엇으로 만든 장본인은 시스템이다. 특히 공권력의 규제는 에로 비디오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용한다. 몇 년 전에 어느 에로 프로덕션 제작자를 만났을 때, 빨리 허리 아랫부분에 대한 제약을 풀지 않으면 머지않아 일본 에로 영화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고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한 그는 에로 비디오의 국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조그셔틀의 달인들'이 단 한 가닥의 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등급보류 판정을 펑펑 날리고 있는 이상, 에로 비디오는 계속 하반신 불수 상태로 부자연스러운 체위를 구사하며 신음소리만 요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너무 풀어줘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섹스 사이트에서 몇만원만 긁으면 하드코어 동영상을 마음껏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느 사회나 음화(陰畵)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좀더 잘 만든 음화'이지, 표현의 자유를 억제당한 채 어영부영 러닝타임이나 때우고 재활용 테이프로 사용되는 그런 소프트웨어는 아니다. 제도와 유통.제작의 시스템 관리가 좀더 철저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나름대로의 미학과 테마를 담은, 그리고 가끔씩은 충무로 주류영화에 자극과 위협을 줄 수도 있는 '얼터너티브 에로 비디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형석(월간 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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