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50. MRI 입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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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필자의 초청으로 KAIST를 방문한 로터버(2003년 노벨상 수상, 왼쪽에서 셋째). 오른쪽 둘째는 79년에 노벨상을 받은 코맥. [KIST 이순재 영상담당 제공]

“로터버 교수님, MRI를 한번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조 교수님, 반갑습니다. 그동안 학술지를 통해 잘 알고 있는데 편한 시간을 내 오십시오.” 힐랄 교수의 강권에 못 이겨 내가 전화하자 로터버 교수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받아줬다. 그는 내 활약상을 훤히 알고 있었다. 기왕 MRI에 관심을 갖기로 한 만큼 실체를 빨리 파악해 계속 할지 그만둘지를 결정해야 했다. 뉴욕 스토니브룩대는 미국 동부의 명문이었다.

로터버 교수를 만나기 전에 머슬리 박사를 통해 MRI에 대해 꽤 많은 지식을 얻은 상태였다. 그래도 실제 그 원리를 발견한 로터버 교수의 연구실에 가서 그가 개발 중인 기기며 원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연구는 실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게 가장 좋다. 중견 과학자가 된 내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뉴욕 스토니브룩대는 컬럼비아대에서 자동차로 한두 시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특히 스토니브룩대 인근에는 내가 1970년 초부터 1년간 있었던 브룩해븐핵물리연구소가 있었다. 로터버 교수가 MRI의 원리를 개발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구레나룻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그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실험장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연구실 한 켠에 그가 개발하고 있는 MRI가 있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보여 주면서 그는 MRI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그 대학에서 별 대접을 못 받다가 좋은 조건으로 일리노이주에 있는 일리노이대로 옮겼으나 거기서도 한동안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MRI 개발 공로로 스위스공대 리처드 언스트 교수가 90년 노벨화학상을 받자 로터버 교수의 노벨상 수상은 물 건너 간 것으로 본 사람이 많았다. 대학의 푸대접도 그런 이유가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로터버 교수는 20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기는 했으나 그 영광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78세를 일기로 올해 사망했다. 노벨상이란 그런 것이다. 73년에 그의 첫 MRI 논문이 나왔으니 무려 34년 만에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로터버 교수를 만나고 나오면서 MRI와 한판 승부를 벌여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MRI가 극히 초창기인 데다 아직 개발 여지가 무궁무진해 보였다. 로터버 교수의 자세한 설명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 했다. 내가 그의 연구실에 갔을 때 푸대접을 당했다든가 무례하다는 인상을 받았더라면 내 성격에 분명히 내치고 나왔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내가 이룬 연구 업적을 얘기하면서 “MRI를 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에도 나는 가끔 그에게 연락해 서로의 관심사를 얘기했다. 82년 내가 한국에서 연 MRI 및 PET 연구 심포지엄에 온 그는 강연도 하고, 나와 함께 설악산 구경도 했다. 나중에 나도 그의 초청으로 일리노이대에서 강연을 했다.

조장희 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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