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자폭하라 권하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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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에 들어와 막상 해보니 싹수가 노랗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서서히 가라앉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자폭하라고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달 29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위촉돼 화제를 모았던 소설가 이문열(사진)씨가 한나라당을 향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한달간의 공천심사 과정에서 느낀 절망과 무력감 때문이란다.

그는 먼저 외부 인사로서의 정보 부재를 한탄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외부 위원들의 정보력 부재가 극명했다"는 것이다. 결국 "밖에서 막연하게 저 사람은 안 돼, 잘라야지 생각했던 것도 막상 들어와서 설명을 듣고 모르던 내용들을 알게 되면 거의 대부분 기존 정치권에 의해 설득돼 버린다"고 李씨는 토로했다.

한나라당의 인물 부재도 지적됐다. 그는 "기존 인물들을 대신할 대안세력이 없는데 무조건 자른다고 할 수 없었다"며 "지금 추세로 가면 한나라당은 1백석도 못 건질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여기 사람들은 1당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85석쯤 건져 1당이 돼봐야 4년 뒤엔 자민련 꼴이 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단수공천 시비에 휘말린 5, 6공 출신 의원들을 염두에 둔 듯한 말도 했다. 그는 "우익이라는 이념과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구체적인 전력이 문제"라며 "당이 지향할 가치와 안 맞는, 당 정체성의 마지노선을 넘는 사람까지 단수공천으로 정해 놓고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적절치 못한 인물을 공천한 것 아니냐는 질타로 들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져야 했던 짐이 있다고 본다"며 "당에 들어올 때 마음속으로 이 선 이상은 물갈이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은 그 선을 넘겨 수용된 게 사실"이라고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공천심사 과정에서의 모순도 지적했다. 그는 "심사위원 중 상당수가 전국구 의원을 바라는 것 같다"며 "작가가 자기 작품을 심사하는 셈으로 말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실망감을 쏟아내면서도 李씨는 중도에서 포기하진 않겠다고 했다. "히틀러라는 끈 떨어진 하사관이 나치를 조직했을 때 독일 지식인들은 비웃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며 "그런 지식인의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남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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