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아이들(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설혹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내 앞에 나타난다해도 결코 만나지 않을 겁니다.』
엊그제 어느 TV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10대 소녀는 유창한 영어로,그러나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의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 소녀는 70년대 후반 이 땅에서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여진채 길가에 버려져 육영기관에 위탁됐다가 영국에 이양된후 10년도 훨씬 넘어 「모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피부색깔이나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은 틀림없는 한국인이었지만 말하고 행동하는데서는 한국인이라는 느낌을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단호한 어조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한국과 부모들에 대한 적개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두말할 나위없이 부모 자식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애정의 상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배운다. 보거나,듣거나,만지는 모든 행위가 사랑의 원천이 되므로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에 더 비중을 두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재작년 미국에 열두살짜리 소년이 생모와 결별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던 사건이 좋은 예다. 그 소년은 8년전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다른 가정에 입양됐는데 생모가 자신을 되돌려 받으려하자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생모와의 결별을 모색한 것이다. 사랑을 느끼기전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그로 하여금 최소한의 「핏줄의식」조차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기아나 미아는 세계 모든 나라가 골치를 썩이는 문제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 이후 계속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소 주춤하는 기색이더니 최근들어 다시 늘어나 매년 5천명을 넘는 어린이들이 버려지고 있다 한다. 우리의 경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해외입양이 국내입양의 두배나 되고 있다는 점이다.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왜 낳느냐』고 부모를 질책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국내든 해외든 입양을 알선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어린이 날」을 맞아 대다수의 행복한 어린이들을 위해 온갖 행사를 벌이는 것도 좋지만 이들 버려지는 아이들의 문제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봄직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