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 가정만세] ‘일 안하기’ 꼼수만 난무하는 명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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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아는 이로부터 들은 거짓말 같은 실화다. 자기 회사에 추석이나 설 등 명절 때만 되면 번번이 해외출장을 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중년의 기혼여성인데, 처음 몇 번은 동료들도 ‘우연이겠지’ 했단다. 그러나 거듭되는 우연의 일치에 의심을 품게 되는 건 인지상정. 알고 보니 그녀는 부서에서 명절 기간과 겹치는 출장 건이 생길 때마다 앞장서서 손을 들었고, 다른 사람이 가게 될 경우에는 당사자와 비밀리에 접촉해 자신이 대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읍소 섞인 청탁을 했더란다.

 하나 더. 전업주부 J씨(38)의 손아랫동서는 명절만 되면 하늘이 두 쪽 날 것 같은 극심한 편두통 때문에 제사 당일 아침에야 겨우 시댁에 얼굴을 내민다. 맞벌이한다는 이유로 1년에 몇 번 시댁에 오지도 않는 동서다. 제수 장만은 따라서 시어머니와 J씨의 몫. 설거지마저 두통 때문에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동서는 그 옛날 중국 미인 서시(西施)처럼 미간만 잔뜩 찡그린 채 앉아 있을 따름이다. J씨는 “성질대로 하자면 한 대 치고 싶다”고 말한다.
 추석이 2주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한가위 연휴는 나흘만 휴가를 내면 11박12일간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골든 홀리데이’란다. 허나 맞벌이 주부들에게 그런 얘기는 ‘염장질’에 가깝다. 남자들은 인정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명절 치르기는 분명 수고롭고, 여성에게만 불공평한 패밀리 비즈니스다. 나는 몇 시간을 서서 불 앞에서 전 지지는데, 남편은 방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 있다가 지져다 주는 전 맛보는 구도라니. 위의 두 여성이 갖가지 지략을 동원해 명절을 피하는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런데 머리 좋은 여성들도 이렇게 기막힌 우연의 힘을 자주 빌리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사실, 잊으면 곤란하다. 곰이 아닌 다음에야 몇 년째 되풀이되는 동일한 사건에 의혹을 품지 않을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 자신이 회피한 노동은 고스란히 다른 여성들에게 전가된다. 전업주부 동서가 맞벌이 동서를 한 대 치고 싶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충분히 가능한 이유다. 내가 아는 한 맞벌이 주부(35)는 1년에 딱 두 번 대구의 시댁을 방문한다. 그녀는 살림에 굉장히 서투르다. 전 지지다 끓는 기름에 다섯 손가락을 한꺼번에 덴 적도 있다. 그래도 모든 식구가 명절에 그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뭐든지 하겠다고 덤비고 보는 태도에서 뭔가 통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게다. 명절 스트레스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문제이지, 잔머리를 써 회피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번 한가위에는 출장과 두통이 없는 명랑한 명절을 위한 아이디어를 찾아보면 어떨까.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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