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메르켈과 사르코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우선 답답함을 덜기 위해서라도 창의적인 리더십의 출현으로 민주정치의 건전성과 능률을 보여 준 독일과 프랑스의 최근 사례를 살펴보며 이들이 우리의 민주정치 발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물론 유럽과 한국 정치의 환경이나 문화가 크게 다름을 모르는 바 아니나 시급한 정치의 선진화를 위해 민주정치의 성공 사례를 참조하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얼마 전 세계에서 강장 영향력이 큰 여성으로 미디어에 선출된 바 있다. 특출한 카리스마나 정치력이 알려지지 않았던 메르켈 총리가 이처럼 독일뿐 아니라 세계적인 지도자로 지목된 이유는 그가 일관성 있는 원칙에 의해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집행해 나가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이라크 포로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를 솔직히 제기했고,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는 국제적 노력에 미국이 더 이상 주저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에서는 러시아의 인권 문제 및 언론자유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도 과감했다. 특히 중국의 지도자들에게도 경제협력의 중요성과 더불어 인권과 복지 문제, 개방과 언론자유의 문제 등을 빼놓지 않고 강조해 왔다. 이렇듯 원칙을 강조하는 메르켈 총리의 외교력이 돋보이는 큰 이유는 그러한 일관성이 국제적 우호관계나 경제협조를 전혀 손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대미국·러시아·중국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원칙과 신뢰를 동시에 추구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메르켈 총리의 입장이, 인권 문제를 러시아나 중국에 제기하지 못했던 사민당의 슈뢰더 전 총리와 대비된다는 헤럴드트리뷴의 주디 뎀시의 지적은 생각해 볼 점이다. 본디 인권이나 환경 문제 등은 진보를 자처하는 사회당이 앞장선다는 전통적 도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보수당인 기민당 대표로서 사민당을 포함한 대연정을 이끌고 있지만 인권과 기후 문제에 국내외적으로 리더십을 장악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특히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인권이나 독재와 같은 문제를 비켜가야만 한다고 내세우는 한국 진보진영의 입장은 생각해 볼 문제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이른바 진보적 지도자들이 언제부터인가 북한의 인권과 독재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권과 반독재투쟁의 깃발은 이제부터 어느 쪽에서 들고 갈 것인가.

한편 사회당 후보를 가볍게 압도하고 선출된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를 세계무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강대국의 반열에 좌정시키려는 야심에 찬 행진을 시작했다. 그런 역사적 전략을 추진하는 힘은 우선 국민적 합의로부터 비롯된다는 자명한 이치에 맞춰 사르코지 대통령은 놀랄 만큼 과감한 포용인사로 새 정권을 출발시키고 있다. 정치력 또는 권력의 수입이나 생산이 없으면 지출이나 소비는 불가능하다는, 권력의 적자운영이 가져오는 위험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외무장관과 유럽담당장관의 자리를 야당 인사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후보로 역시 야당 편인 스트라우스 칸을 지명함으로써 그의 초당적 자세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르코지 대통령의 행보는 우리 정치인들에게도 분명하게 정치력 및 권력창출의 기본원리를 환기시키고 있다. 선거에는 지더라도 당권을 잡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 한 선거에 임하는 정당 지도자에게 당내 화합은 제일의 절대 필요조건이다. 국제사회나 남북관계에서 나라의 위상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지상목표라면 여야를 초월해 국민화합을 이루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만 한다. 국가 이익보다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국민 분열을 부추기는 정치인은 빨리 추방되어야 한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