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PLAZA] 가정교사 맞이한 허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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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인물이 한국 프로농구판에 뛰어들었다. 독일에서 명성을 떨친 미국 출신의 캘빈 올덤(46).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줄곧 독일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약한 올덤은 KCC의 어시스턴트 코치가 돼 허재 감독을 돕기로 했다. 올덤의 역할은 KCC의 코치이자 허 감독의 ‘가정교사’인 것 같다. 후자가 더 중요한 역할일 수도 있다.

농구팬들은 허재 감독을 엄청난 다혈질이자 아무리 불리해도 끝까지 싸우는 승부사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손등 뼈가 부러진 허재가 눈두덩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결승골을 넣은 1997~98시즌 챔피언결정전 6차전은 ‘허재 농구’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허재 감독이 다혈질처럼 보였다면 계산된 행동의 결과다. 그는 이길 가능성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않는다.

올해 2월 6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 68-108로 무참히 패한 경기였다.

허 감독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평소 반말로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들에게도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젊은 기자들은 ‘꼬리를 내린 허재’를 처음 봤다.

코치 경력 없이 팀을 맡은 허재 감독은 아직 풋내기다. 데뷔 첫해 조성원-이상민-추승균 등 베테랑의 힘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조성원이 은퇴하고 이상민이 부상한 지난 시즌에는 꼴찌를 했다. 선수에게 맡겼던 첫 시즌보다 뜻대로 한 지난 시즌 성적이 나빴다. 허 감독의 용산고 선배인 KCC의 정몽익 구단주와 최형길 단장은 ‘허 감독만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1982년 버지니아공대를 마친 올덤은 이듬해 독일의 바이로이트 클럽에 입단해 샤를로텐부르크 베를린(90~91년)·울름(92~95년) 등에서 뛰었다. 95년 은퇴해 바이로이트 코치가 됐고, 이듬해 감독으로 승진했다. 98~2002년에는 바이엘 레버쿠젠의 감독을 맡았는데 단장 역할을 겸했다. 2003~2004년 미국 메인대 코치로 일한 올덤은 2005년 레버쿠젠의 숙적인 베를린의 코치가 되어 독일로 컴백했다.

지금 독일 농구계에서는 올덤의 한국행이 화제다. 지난 시즌 베를린이 플레이오프 첫판에 탈락, 코칭스태프 개편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이 아니더라도 올덤을 필요로 하는 팀은 많다. KCC는 적잖은 ‘공’을 들여 올덤을 영입한 것이다.

허 감독은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허 감독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계획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올덤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독일식 구단 운영에 익숙하다. 허재 감독은 올덤 때문에 불편할 수도, 올덤 때문에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있다. 구단은 후자를 기대할 것이다.

허 감독은 지금 불만을 드러낼 입장이 아니다. 자신이 선배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점을 잘 안다. 구단에 대고 뭘 요구할 처지도 아니다. 얼마 전엔 연봉이 얼마 되지 않는 전력분석원으로 몇 달 써달라는 중앙대 후배의 ‘가벼운’ 부탁도 들어주지 못했다.

허 감독이 다가오는 겨울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앞으로의 농구인생이 걸려 있다. 올덤과 함께 좋은 성적을 낸다면 성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올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시즌을 망친다면 KCC를 그만둘 경우 당분간 모교인 용산고나 중앙대 외에는 갈 곳이 없을 것이다.

허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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