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총리경질을 보면서-新권위주의 경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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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침내 그동안 우려해오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李會昌총리가전격적으로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해버린 것이다.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대통령이 李총리의 사표를 즉각 수리하고 곧바로 차기 총리 내정자를 대변인을 통해 발표해버렸다는 사실이다.어떻게그렇게 빨리 차기 총리를 내정할 수 있었을까.그래서,이미 짜인순서에 따라 李총리가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말하자면 李총리가 전격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아니라 사직서 제출을 어떤 형태로든 요구받은 인상이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 일부 방송 언론매체들이 뉴스시간에 李會昌총리가사려깊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式으로 보도한 것은 그야말로 사려깊지 못한 보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그리고「문책성 인사」운운의보도도 했으니 스스로 모순된 보도를 한 셈이다 .「문책성 인사」라면 사직서 제출은 대통령의 뜻에 따르는 사려깊은 결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진상이 아직까지는 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얼마간 가려질 것이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이 사려깊지 못한 행동을 했는지는 일단 판단 유보의 상태로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통일안보 정책조정회의 시비」가 지난4개월동안 암암리에 양쪽에서 쌓여온 불만의 화약고를 결정적으로건드렸다는 점이다.이쪽의 화약고가 터지는데 저쪽의 화약고가 연쇄적으로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을 법한가 말이다.「통일」을 논하고「조정」을 논하는 회의로 인하여「분열」과「불일치」가 야기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긴 대통령이 감사원장으로 있던 李會昌씨를 총리로 임명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고,앞으로 닥칠 일들을 예감하며 우려의 눈길을 보냈었다.그것은 鮑叔을 재상으로 등용하려 하는 桓公을 말린 管仲의 심정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재상인 관중이 병을 얻어 몸져 눕자 군주인 환공이 찾아와 물었다.『仲父의 병이 심한 것 같소.만약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누구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이 좋겠소.포숙은 어떠하오.』관중이 대답했다.『포숙은 군자입니다.그는 千乘의 대국일지라 도 정당하게 주는 것이 아니면 결코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그 사람에게 맡기시는 것은 적당치 않습니다.그 성격이 善을 좋아하고 惡을 미워하는 정도가 지나칩니다.그래서 한가지 악을 보면 죽을 때까지 못 잊는 위인입니다(見一惡 終身不忘) 』 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나올만큼 절친했던 친구인 포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관중이기에,그렇게 환공을 말렸던 것이었다.그야말로 대쪽 같은 성격을 지닌 포숙이 재상이 된다 해도 그 자리에 오래 있지못할 것임을 관중은 미리 내다 보고 있었던 셈이다.관중型보다는포숙型에 가까운 李會昌씨는 감사원장으로 계속 재임하면서 이 시대가 부여하는 막중한 과업을 감당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더욱 느껴지는 시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사태가 이렇게 되고보니,비록 결과론이긴 하지만 총리 임명과 사직서 제출이라는 그동안의 일련의 手順이 감사원장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한 교묘한 권력게임의 일환이 아니었느냐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중국 역사상 훌륭한 명재상으로 晏子를 꼽는 편인데 그의 언행을 기록한『晏子』에 보면,사직서를 제출하고 도망가는 안자와 그 사직서를 반려하고 며칠 동안이나 손수 수레를몰아 안자를 뒤쫓아가는 군주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나온다.결국 군주인 경공이 길바닥에 엎드려 안자에게 큰절을 하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는 제발 과인을 도와달라고 사정사정하여 겨우 안자의 마음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안자가 죽자 경공은『이제 과인을누가 책망해줄꼬』라며 슬피 통곡한 다.
지금이야 그런 고전적인 군주와 재상의 관계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알지만,한편 생각하면 봉건주의 시대에도 그랬는데 하물며 민주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국제적으로,또 국내적으로 타개해나가야 할 문 제들이 산적해 있는 현재의 우리나라 형편에서 이번 사태는 어느 쪽의 잘잘못을 떠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정권 담당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권력게임을 하더라도 비열하게들 하지 말고 정말 게임답게 규칙을 잘 지킴으로써 품위 를 유지하고 잠재된 능력들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문민정부라는 이름 아래 新권위주의가 지배한 시대였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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