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의KISS A BOOK] 엄마라고 집안일만 하란 법 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헌신적이고 다정하며 언제나 내 편인 엄마! 지금껏 동화의 넘버원 등장인물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동화 속 엄마들이 심상치 않다. 단역도 마다 않고 묵묵히 글을 빛내주던 그녀들이 “엄마의 변심은 무죄”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파업은 기본이고 가출까지 불사한다.

 김희숙의 『엄마는 파업 중』(푸른 책들)에 당당히 명부를 올린 엄마는 머리에 빨간 띠를 둘렀고, 루스 화이트의 『엄마가 사라진 어느 날』(푸른 숲)과 수 코벳의 『엄마가 사라졌다』(생각과 느낌)의 엄마는 사이좋게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어리둥절한 채 곰곰 생각해 보니 엄마라는 자리만큼 애매모호한 것도 없다. 어엿한 프로 직업이라고 주장하자니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직종이라 말발이 안 서고, 각별한 모성애를 내세워 보지만 그건 모든 생명체의 공통분모이니 목청 돋우기 힘들다. 애초에 인류 공헌의 숭고한 정신을 품고 아기 낳은 것 아니니, 힘들다는 항변도 개인사의 푸념으로 묻힐 뿐이다.

누적되는 피로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함에 슬슬 휴직 생각이 나신다면?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루스 화이트의 작품에 나오는 시 한 편 읊어 보시기 바란다. “새벽의 미풍이 그대에게 말해 줄 비밀이 있다네/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마/ 그대는 정말로 원하는 것을 바라야 하네/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마/ 사람들은 돌아서서 문지방을 넘네/ 두 세계가 서로 맞닿는 곳을/ 문은 둥글고 열려 있다네/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마.”

13세기 이슬람 시인 루미의 시 한 편에 마법이라도 있는 걸까. 시를 읽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어째 어깨가 근질근질하다. 이 시 때문에 날개 달고 훨훨 날아간 동화 속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다. 하지만 잠깐! 수 코벳의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처럼 열두 살이 돼 아들의 삶 속으로 금의환향할 자신이 없다면 섣부른 가출은 자제하시는 게 현명할 듯.

들끓던 마음 녹여 정좌하고 찬찬히 세 권의 책을 다시 보자. 이건 단지 엄마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통과의례에 대한 서사시이기도 하다.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질긴 탯줄이 어떻게 서로의 삶을 엮어 가는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품에 안은 아기의 핑크 빛 볼과 사랑에 빠졌던 엄마는 결국엔 그 아이의 짓푸른 성장통의 멍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우왕좌왕 일어나는 생의 에피소드들은 지나고 보면 벗어나지 못해 발버둥치던 고향의 아련한 저녁노을 같은 것이 아닐까. 대상 연령은 엄마 없는 해방전선을 꿈꾸는 12세 이상의 어린이와 자유선언서 낭독을 꿈꾸는 엄마들.

임사라 <동화작가> romans828@naver.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