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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왜 정치를 꺼릴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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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된 직후 유력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극장을 찾았다. 여권의 대선 예비주자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지만 나중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이 영화를 챙겨 봤다니 여야를 불문한 현상이었다.

 바쁜 정치인들이 갑자기 영화 관람에 줄을 선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전부터 영화를 즐겨 보았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으니 영화 사랑이 돈독해서도 아니었을 테고, 어두컴컴한 극장을 찾은 걸 보면 민심의 현장을 살피기 위한 것도 아니었을 터이다. 또 광주항쟁 정신을 각별히 되새기려는 행동이었다면, 언론에 관람 사실을 노출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국민의 주목을 끌고, 나아가 이 영화에 호의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호남이나 진보성향 유권자의 표를 노린 ‘쇼’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럴진대 정치인들의 추파에 대해 영화계의 반응이 시큰둥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제작사 대표가 “달갑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코멘트를 했다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화려한 휴가’를 둘러싼 정치권의 ‘구애’와 영화계의 부정적 반응은 영화와 정치 간의 흥미로운 대비관계를 보여 준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영화는 인기 있는 아이템인 반면, 정치는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인기 있다는 말은 고객의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뜻한다. 영화별로 차이가 클 수밖에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높다는 사실은 영화 부문의 고객만족도가 비교적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에 비해 정치에 대한 고객만족도가 형편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체감하고 있다. 겉으로 내세우는 수사를 걷어 내고 실제 행태를 두고 판단컨대, 아직도 많은 정치인이 왕조 시대 군림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치를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판에서 고객 개념이 실종돼 정치의 고객이 국민이고 정치인의 보수는 대국민 서비스의 대가로 국민의 세금에서 지불된다는 것을 아예 잊은 듯하다.

또 하나의 대비는 식성의 차이다. 정치판은 잡식성이다. 정치인은 자신에게 유리하면 무엇이든 끌어들여 이용하려 한다. 그러나 영화의 식성은 예상보다 까다롭다. 꺼리는 것 중의 하나는 정치다. 우선 소재 면에서 정치는 영화로 풀기에는 너무 복잡다단하고 다중적이다. 영화가 선호하는 스펙터클이나 판타지를 제공하기 어려워 별 매력이 없다. 영화가 정치를 꺼리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가 우리의 ‘나쁜’ 현실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현재 정치의 모습은 현실이 풍요롭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못하다는 사실과, 우리가 이기적 동기에서 서로 다투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또 정치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오지 않는 행복을 약속하면서 희생을 요구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정치 영역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영화 속에 정치인이 등장하는 경우엔 십중팔구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쉬리’(1999)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남파 테러리스트 박무영(최민식 분)은 정치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축구경기가 열리는 잠실운동장을 폭파해 “썩은 남북 정치꾼”들을 일거에 제거하려 한다.

 어떤 이는 고위 정치인의 영화 관람이 해당 영화의 흥행을 도운 사례를 들어 영화계가 정치인을 환영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흥행은 한두 사람의 움직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아마도 진실은 흥행할 만한 영화를 정치인이 관람했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정치인만큼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고객의 바람을 계속 배반하는 정치인들을 퇴출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정치판에 비하면 영화판은 훨씬 공정한 것 같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영화는 싸늘하게 외면당하니까.

곽한주 동아방송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