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대책/북경서 따로 논 「외교손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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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황 대사 “미 탈피 중국과 먼저 논의”/정 수석 발끈… 발언취소 요구소동
김영삼대통령이 4박5일간의 중국방문을 마치고 떠나기 직전 북한 핵문제 처리방향과 관련한 엄청난 혼선이 빚어졌다.
북경 현지시간 29일 오후 9시30분 황병태 주중 대사의 발언으로 비롯된 이 소동은 30일 오전 2시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해명·정정으로 이어졌다.
온국민의 초미의 관심인 북핵문제를 두고 상대국에서 벌어진 이 상황은 우리 정부의 안보정책팀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번질 우려도 있다.
○…김 대통령은 한중 정상회담 등 중국에서의 주요일정을 마치고 귀국 하루전인 29일 청와대출입 수행기자들과의 오찬에서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북한 핵문제에 관해 장시간 논의했으며 단독회담 거의 대부분을 여기에 할애했다고 부연했다.
김 대통령은 정상간에 오간 얘기를 공개하기는 부적절하다고 전제한뒤 다만 북한 핵에 대해 상당히 깊이 있고 충분한 의견을 교환했다는 말로 이 문제가 「잘 풀려」가고 있음을 암시했다.
김 대통령은 『북핵에 대한 미·일·중 3국의 생각엔 약간씩 차이는 있어도 한반도 비핵화라는 기본원칙에 전혀 차이가 없다』면서 중국과도 많은 교감이 이뤄졌음을 거듭 피력했다.
○“일 역할도 한계”
○…김 대통령과 수행기자단의 간담회가 진행되던중 황 대사는 김 대통령의 이번 방중성과가 미흡하다는 국내 언론보도에 불만을 토로.
황 대사가 김 대통령의 방중성과를 언론에 설명한다는 조건으로 기자회견을 갖기로 청와대측과 합의했다.
황 대사는 이날 오후 9시30분 20여명의 외신기자들까지를 포함한 30여 기자들앞에 섰다.
황 대사는 북핵과 관련,『지금까지는 한국이 미국과 협의한뒤 이를 중국에 통고하고 도움을 청하는 식이었다』며 우리 외교방식을 비판하고는 『앞으로는 중국과 처음부터 논의하고,같이 행동하기로 했다』고 우리 외교기조가 선회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황 대사는 또 『북핵에 대한 일본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북핵에 대한 추가사찰을 위해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간의 대화가 곧 재개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리펑(이붕) 총리가 만찬석상에서 『중국은 한반도에 핵이 없는 상황에서는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하지만 핵이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나라보다(북한에 대해)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북한내의 핵무기 부재를 암시하는 이 총리의 말을 되풀이한뒤 『중국은 북한에 대해 핵의 평화적 이용을 포함,기술지원이나 조언을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황 대사는 『미국도 중국의 도움없이 무슨 대북제재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 총리의 말을 인용하며 북한이 90%는 사찰을 받은 셈이며 나머지 5∼10%는 대화로 충분히 풀 수 있다더라고 설명했다.
황 대사는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성과가 대북 인식의 오해를 풀기 위해 같이 노력한다는 것이고,중국이 오해를 푸는 역할을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냐』며 『우리 외교가 대미·대일 일변도에서 탈피해야 하며 중국이 이미 이 문제에 개입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황 대사는 그의 거침없는 발언에 놀란 기자들이 『당신의 말대로라면 정책의 일대 선회를 의미하는데 미국 등과 사전협의가 이뤄졌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황 대사 회견내용을 뒤늦게 알게된 청와대 당국은 황 대사를 전화로 연결,보도진에 즉시 해명할 것을 요구.
회견장에 다시 나타난 황 대사는 『곰곰 생각해보니 몇가지 보충한다는게 정리가 안됐다』며 내용정보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고 보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 대사의 해명을 통해 불을 끄려던 청와대 관계자는 황 대사가 발표자를 익명으로 해달라는 정도의 언급만 있자 그를 밖으로 불러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고,잠시후 나타난 황 대사는 『전면 취소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
○“대화통로 강화”
○…황 대사 본인의 직접 해명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청와대 관계자는 아연실색,외교안보 고위관계자들에게 긴급 연락.
정 외교안보수석은 오전 1시쯤 한국프레스센터에 나타나 『황 대사의 발언내용은 정확지 않다. 사실도 일부 다르고 정부입장도 아니다』며 보도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
황 대사와 함께 단독 확대회담 배석자인 정 수석은 『북한이 IAEA 사찰을 받기로 한바 없다』며 『한중 직접대화를 통해 대북문제에 접근하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
정 수석이 『이런 애기들은 정상회담에서 나온바 없다』고 하자,황 대사는 울상을 지으며 『나도 그런말 안했다』고 주장.
정 수석은 『우리 정부가 대화를 하겠다고 한 것은 기존입장위에서 대화를 한다는,즉 대화의 문은 열어 놓겠다는 정도』라고 설명.
정 주석은 『중국측이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안정을 얘기하기에 김 대통령이 중국의 적극적 역할을 당부한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 정부가 전적인 한중협력으로 일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고 강조.
정 수석은 『김 대통령이 한·미·일 3국이 중심이 돼 북핵문제를 풀려고 했는데 이번 방중으로 중국과의 대화채널이 강화된 것』이라고 부연.
정 수석은 이어 김 대통령의 방중으로 북핵문제 해결이 진전됐다는 평가의 이유에 대해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대화를 통한 해결원칙을 그대로 고수하여 표현은 종전 그대로지만 해석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정 수석은 유엔안보리의 대북문제 처리방향에 언급,『며칠만 기다리면 안보리의 제재건,의장성명이건 밝혀질 것』이라며 『어떤 형식이든 대북 물리적 제재는 아닐 것이며 IAEA와의 대화와 사찰수락 촉구가 될 것』이라고 전망.
○혼선 두가지 해석
○…이러한 혼선이 빚어진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황 대사의 발언이 내용상으로는 맞지만 우리의 전략이 노출된 결과가 돼 청와대 당국이 부인하고 나섰다는 관측과 중국의 논리에 빠져든 황 대사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지적 등이 나오고 있다.
전자의 해석은 북한핵을 대화로 풀어야 하며,현실적으로 중국을 배제한 가운데 북핵을 해결할 수 없는 만큼 황 대사의 설명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반면 김 대통령의 미·일을 축으로 한 외교노선과 북핵의 단호한 대응의지에 미루어 황 대사 개인의 실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금년초 본국 공관장회의 때 황 대사는 강경한 처리를 주장하는 한승수 주한 미 대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파동으로 미국으로 출발한 한승주 외무장관을 긴급 수배하여 미국에 또다른 해명을 하는 등의 법석을 떨었다.<북경=김현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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