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38.82년 부산美문화원사건 김현장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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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82년 3월18일 오후2시 부산 美문화원은 불길로 뒤덮였다.
이 불로 1층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대학생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화상을 입었으며 문화원 1층이 전소됐다.
文富軾씨(당시23세.高神大4년)등 젊은 학생들이 저지른 이「부산美문화원 방화사건」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침묵이 강요되던 당시 사회에 최초로「반미」를 제기한 사건이었다.
또 방화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드러난 金鉉奬씨(당시32세)가 2년가까이 머물렀던 천주교 원주교구 가톨릭교육원의 崔基植신부가 범인은닉혐의로 구속돼 교계는 물론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부미방 사건(약칭)은 당시 미국의 그릇된 대한외교정책을 바로잡는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일부 人士들의 언행을 보더라도 당시 미국은 한국을 식민지 대하듯 하는 측면이 있었지요.』 金鉉奬씨는 당시 사건은 군사독재정권하의 억눌린 사회풍토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며『그때나 지금이나 더딜지라도 비폭력만이 시민의 지지를 받을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 미국적인 것은 무조건 반대하는「반사조건적인 반미」대신「이성적인 반미」는 지금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국제사회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이성적으로 반미운동을 전개한다면 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과정에서 겪은 것과 같은 일방적인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 金씨는「부미방」사건은 처음부터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며 단지행동날짜만 당초계획과 차이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원래는 방화후 文씨등과 해외로 도피할 생각으로 배편을 알아보는등 준비를 진행중이었는데 사건이 앞당겨 터지고 말았지요.』이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金씨는 83년3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88년12월 특사로 석방된다.
석방된뒤 전민련 국제협력국장으로 활동하던 金씨는 전민련회의내용을 해외단체에 보낸 것이 문제가 돼 8개월만에 다시 투옥된다. 두번의 수감생활중 양친을 모두 여의는 불행을 당한 金씨는『이때 같이 붙잡힌 처가 안기부 수사관들의 고문으로 유산을 했다』고 말한다.
金씨의 삶에서 광주항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서울에서 광주의 비극적 상황을 장거리전화로 전해듣고 80년 5월19일 밤 광주로 내려갔지요.이틀후 전주로 나와 광주의 상황을 외부에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전두환 살륙작전」이란 유인물 2만장을 만들어 서울로 배포했지 요.』 『광주의 비극엔 작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군사작전을 방관하고 있었던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 金씨의 생각이었고 이것이 방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정치엔 뜻이 없다는 金씨는 현재 5.18기념재단을 설립하는데몰두하고 있다.
『5.18은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몸부림이었다』고 평가하는 金씨는『이미 여러번 제의가 있었다』며 기회가 닿으면 부산 美문화원을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李相列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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