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新인구론’ 주장한 베이징대 총장 馬寅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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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26면

‘신인구론’ 발표 직후 베이징대학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담소하는 마인추. [김명호 제공]

1953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과학적인 인구조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총인구 6억193만8035명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다는 쑨원의 우려가 무색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리 죽어도 줄지 않고, 죽이면 죽일수록 늘어나는 게 사람”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매년 1300만 명이 늘고, 2% 증가율이란 예측이 나왔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민생에 치명적인 게 인구 증가라고 확신하던 마인추(馬寅初, 1882∼1982) 베이징대학 총장은 57년 7월 5일 인민일보에 ‘신인구론’을 발표했다. 4년에 걸친 조사를 토대로 한 이 논문은 이후 50년간 중국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열거한 인구의 급속한 증가 이유는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예전엔 졸업이 실업을 의미했지만 사회주의 실시 이후 국가가 직장을 마련해주니 경제상황이 개선돼 결혼 숫자가 늘어났다. 부부가 같은 도시에 근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니 출산 기회도 많아졌다. 임신부에겐 56일의 휴가를 주고, 농촌의 산파들을 전문가들로 대체해 영아 사망률도 줄었다. 양로금 지급으로 노년 사망률도 감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내전이 종식됐고 각지에 산재한 비적을 소탕해 비명횡사하는 숫자가 줄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선 없애기 불가능한 창기(娼妓) 문제까지 해결해 이들도 가정을 꾸리게 됐다. 정부에서는 자녀가 많은 가정에 보조금을 주는 등 모든 여건이 출생률은 증가하고 사망률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대로 가면 식량과 취업, 생활 수준 등에서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인구 억제를 통한 인구 품질의 제고를 역설했다. 그의 ‘신인구론’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58년 1월 마오쩌둥이 “인구가 많은 게 좋을까 아니면 적은 게 좋을까? 지금은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한마디 했다. 이때부터 ‘많아야 좋다(人多好)’는 것이 인구 문제의 주류사상이 됐다. 마인추는 호된 비판을 받았고 60년 1월엔 베이징대학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집 안에서만 칩거하던 그는 79년 베이징대 명예총장과 인구학회 명예회장으로 복귀했다.

노년 인구의 사망률 감소를 걱정했던 마인추는 82년 100세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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