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화보다 “한수지도” 인상/영수회담 이모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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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보안법 폐지요구엔 자료 주며 “참고하라”/“대한민국 대통령은 나” 이 대표 방북 일축
11일의 여야 영수회담은 이전과 다른 몇가지 특징을 남겼다.
보통 영수회담이라 하면 야당 당수가 그 시절의 현안을 들고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여야 협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대통령과 야당 당수가 대등한 입장에서 국정의 문제를 주고 받는 모습으로 국민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이번 영수회담은 이런 점에서 과거와는 달랐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날 이기택대표가 깨알같이 적어온 야당의 주문을 수용하는 모양을 갖추기보다는 통치권자로서 현안을 둘러싼 현실진단과 함께 이러한 요구를 하는 야당의 인식전환을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 대표의 보안법 개폐요구에는 사전에 준비한 보안법·북한 형법과 미국의 관계법령 대비자료를 『참고하라』고 건네주며 단호한 입장을 취했고,미국·일본 등 각국의 인권상황이 지적된 유엔자료를 주며 『우리만 지적됐다』는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여타 현안에 대해서도 『검토·고려하겠다』 『실무진에게 맡기자』는 과거 영수회담의 완곡한 표현대신 『이래서 안된다』는 식으로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 대표는 이어 보안법 개폐와 관련,『민주질서보호법으로 대체하든지 형법을 강화하고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고,김 대통령은 『북한이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는 대치상황에선 법을 더이상 손댈 수 없다』고 분명하게 거부했다.
김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절 내 자신이 이 법의 최대 피해자다. 대통령이 되고 절대 이 법이 악용되지 않도록 집행자에게 지시했다』고 밝힌뒤 『북한이 38선 전방에서 10시간 대남방송하던 것을 13시간으로 늘리고 간첩을 계속 남파하는데 어떻게 이 법을 없앨 수 있느냐』고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미국에서 몇사람이 보안법 개폐를 얘기했지만 잘못됐다는 사과가 있었다』 『미국도 공산당 잡는데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법을 갖고 있다』며 이 대표의 거듭된 요구에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북핵문제 등에 이르러 이 대표는 『북핵은 세계문제이자 민족문제다. 한국이 배제되면 통일·경협에도 큰 문제가 된다』며 『3자회담을 할 용의가 없느냐』고 물었고,김 대통령은 『현재 북미회담이 진행중이고 핵문제가 불투명해 시기가 적절치 않다』고 응수했다.
김 대통령이 『북은 절대 개방하지 않는다. 흡수통일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중』이라고 말한 대목을 놓고 이 대표는 『전문가들이 경협을 별도로 시도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판에 대통령과 나의 인식차가 너무 커 놀랍다』고 난감해했다.
이 대표가 이어 『북이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적화통일 야욕을 갖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화해 오해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나라도 북한에 가서 그런 오해를 풀겠다』고 방북의사를 재천명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북이 우리의 내부분열을 노리고 있어 이 대표의 방북은 그들의 통일전선에 말려드는 행위다. 안 가는게 좋겠다』는 의사를 전한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나지 이 대표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 대표는 『내가 가면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하겠다』고까지 카드를 내밀었으나 김 대통령은 『이 대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우루과이라운드(UR) 재협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김 대통령은 『UR는 1백20여개국이 관여하는 다자간 협상이어서는 재협상이 불가능하다. 국회의 비준동의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역으로 주문했다.
여야 영수간의 대화라기 보다는 한수 가르치는 입장으로 비쳐졌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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